안도현 "러브레터" 22

안도현 러브레터 : 향나무는 갈라지면서 도끼 날을 향기롭게 하고...

'수바시따'는 수천 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고대 인도 민중들의 시가입니다. 단 몇 줄의 언어 조합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이끌어내는 게 특징이죠. 향나무는 갈라지면서 도끼 날을 향기롭게 만든다니!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문학은 우상에 대한 미화와 찬양으로 일관하지만 '수바시따'는 헛된 우상을 섬기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높은 신분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야유를, 지식과 지혜를 갖지 못한 자에게는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냉소를 보냅니다. 보십시오, 인도 사람들도 사윗감을 고를 때 이런다고 합니다. "딸자식은 잘생긴 사내를/어머니는 부자를/아버지는 학력을/친척들은 가문을 보고/동네 사람들은 맛난 음식을 바란다..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열세 살에 저는 고향을 떴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요. 70년대 중반, 대구 변두리의 자취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고, 그 툇마루는 문 없는 부엌의 싱크대로도 쓰였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손에 익힌 게 무 생채 써는 일이었습니다. 제 서툰 도마질은 깍… 뚝… 깍… 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 사는 새댁이 보다 못해 무 써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지금도 무 생채를 먹을 때면 그날의 도마질 소리가 찡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신경숙 소설의 마력도 그것이죠. 자꾸 찡하게 만든다는 것, 머뭇거리면서도 콕콕 찌른다는 것,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그 여자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서툰 듯했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눈을 파시면서도 ..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열세 살에 저는 고향을 떴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요. 70년대 중반, 대구 변두리의 자취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고, 그 툇마루는 문 없는 부엌의 싱크대로도 쓰였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손에 익힌 게 무 생채 써는 일이었습니다. 제 서툰 도마질은 깍… 뚝… 깍… 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 사는 새댁이 보다 못해 무 써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지금도 무 생채를 먹을 때면 그날의 도마질 소리가 찡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신경숙 소설의 마력도 그것이죠. 자꾸 찡하게 만든다는 것, 머뭇거리면서도 콕콕 찌른다는 것,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그 여자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서툰 듯했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눈을 파시면서도 ..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열세 살에 저는 고향을 떴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요. 70년대 중반, 대구 변두리의 자취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고, 그 툇마루는 문 없는 부엌의 싱크대로도 쓰였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손에 익힌 게 무 생채 써는 일이었습니다. 제 서툰 도마질은 깍… 뚝… 깍… 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 사는 새댁이 보다 못해 무 써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지금도 무 생채를 먹을 때면 그날의 도마질 소리가 찡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신경숙 소설의 마력도 그것이죠. 자꾸 찡하게 만든다는 것, 머뭇거리면서도 콕콕 찌른다는 것,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그 여자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서툰 듯했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눈을 파시면서도 ..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지난 5월 18일 (2003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소란이 좀 있었지요. 한총련 대학생들이 정문을 막는 바람에 대통령이 후문을 통해 식장으로 들어간 일도 생겼고요. 그 일을 가지고 누구를 탓하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비친 노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걸 잠깐 지켜보았습니다. 부인도 따라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광주'를 그저 형식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가슴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난의 시절, 민중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죠.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기타를 잡고 노래 하나 불렀습니다.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이 가사의 단어 몇 개를 트집잡아 그에게 붉은 색..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지난 5월 18일 (2003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소란이 좀 있었지요. 한총련 대학생들이 정문을 막는 바람에 대통령이 후문을 통해 식장으로 들어간 일도 생겼고요. 그 일을 가지고 누구를 탓하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비친 노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걸 잠깐 지켜보았습니다. 부인도 따라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광주'를 그저 형식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가슴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난의 시절, 민중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죠.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기타를 잡고 노래 하나 불렀습니다.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이 가사의 단어 몇 개를 트집잡아 그에게 붉은 색..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지난 5월 18일 (2003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소란이 좀 있었지요. 한총련 대학생들이 정문을 막는 바람에 대통령이 후문을 통해 식장으로 들어간 일도 생겼고요. 그 일을 가지고 누구를 탓하며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비친 노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걸 잠깐 지켜보았습니다. 부인도 따라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광주'를 그저 형식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가슴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난의 시절, 민중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죠.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기타를 잡고 노래 하나 불렀습니다.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이 가사의 단어 몇 개를 트집잡아 그에게 붉은 색..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 잡순 이 나라 남편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입니다. 인용문은 시의 앞부분이고 전문은 이보다 훨씬 깁니다. 기억해둘 만한 멋진 구절이 많은 시입니다. 연애 시절 화자가 앓아 누웠을 때, 병상을 찾아온 그 애인은,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일순간에 폭파해버리는 위력을 짐작하시겠는지요? 그 뜨거운 말에 감동한 화자는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라고 말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에게 이 시 한 편 읽어준다면 오늘밤 사랑의 면죄부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 잡순 이 나라 남편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입니다. 인용문은 시의 앞부분이고 전문은 이보다 훨씬 깁니다. 기억해둘 만한 멋진 구절이 많은 시입니다. 연애 시절 화자가 앓아 누웠을 때, 병상을 찾아온 그 애인은,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일순간에 폭파해버리는 위력을 짐작하시겠는지요? 그 뜨거운 말에 감동한 화자는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라고 말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에게 이 시 한 편 읽어준다면 오늘밤 사랑의 면죄부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 잡순 이 나라 남편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입니다. 인용문은 시의 앞부분이고 전문은 이보다 훨씬 깁니다. 기억해둘 만한 멋진 구절이 많은 시입니다. 연애 시절 화자가 앓아 누웠을 때, 병상을 찾아온 그 애인은,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일순간에 폭파해버리는 위력을 짐작하시겠는지요? 그 뜨거운 말에 감동한 화자는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라고 말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에게 이 시 한 편 읽어준다면 오늘밤 사랑의 면죄부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