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러브레터"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ohmylove 2007. 12. 2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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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에 저는 고향을 떴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요. 70년대 중반, 대구 변두리의 자취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고, 그 툇마루는 문 없는 부엌의 싱크대로도 쓰였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손에 익힌 게 무 생채 써는 일이었습니다. 제 서툰 도마질은 깍… 뚝… 깍… 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 사는 새댁이 보다 못해 무 써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지금도 무 생채를 먹을 때면 그날의 도마질 소리가 찡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신경숙 소설의 마력도 그것이죠. 자꾸 찡하게 만든다는 것, 머뭇거리면서도 콕콕 찌른다는 것, 풍금은 보여주지 않고 풍금소리를 들려준다는 것…….





그 여자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서툰 듯했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눈을 파시면서도 단숨에 척척 해내는 무 생채 써는 일은 특히 말이에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경쾌했지만, 그 여자의 도마질 소리는 깍… 뚝… 깍… 뚝…이었어요. 그렇게 그 여자는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을 통해 우리집으로 들어왔고, 대신 그 대문으로 어머니께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 중에서


* 이 글은 안도현 시인 께서 제공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