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26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 잡순 이 나라 남편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입니다. 인용문은 시의 앞부분이고 전문은 이보다 훨씬 깁니다. 기억해둘 만한 멋진 구절이 많은 시입니다. 연애 시절 화자가 앓아 누웠을 때, 병상을 찾아온 그 애인은,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일순간에 폭파해버리는 위력을 짐작하시겠는지요? 그 뜨거운 말에 감동한 화자는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라고 말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에게 이 시 한 편 읽어준다면 오늘밤 사랑의 면죄부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

사랑의 나무를 가꾸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느님이 뜻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늘 삐걱거립니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 하고, 가끔은 가까이 있는 게 무거워서 홀가분하게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일은 실패했는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의 종교의 번성은 그 실패의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하느님을 나무라고 야유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나무를 심은 것은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나무를 가꾸고 키워 가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여자를 만들 때, 남자의 머리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자의 발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

사랑의 나무를 가꾸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느님이 뜻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늘 삐걱거립니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 하고, 가끔은 가까이 있는 게 무거워서 홀가분하게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일은 실패했는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의 종교의 번성은 그 실패의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하느님을 나무라고 야유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나무를 심은 것은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나무를 가꾸고 키워 가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여자를 만들 때, 남자의 머리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자의 발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

사랑의 나무를 가꾸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느님이 뜻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늘 삐걱거립니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 하고, 가끔은 가까이 있는 게 무거워서 홀가분하게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일은 실패했는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의 종교의 번성은 그 실패의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하느님을 나무라고 야유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나무를 심은 것은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나무를 가꾸고 키워 가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여자를 만들 때, 남자의 머리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자의 발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제 작업실 주변에는 늙은 감나무들이 많습니다. 그 감나무들이 가지마다 뱉어놓은 연초록 이파리들이 요즘 장관입니다. 아마 감나무들은 올 가을에도 누가 따가지도 않을 감을 주렁주렁 매달게 되겠죠. 모든 열매는 나무들의 섹스로 만들어진 것. 수십 년 묵은 늙은 감나무에게도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게 마련이지요. 며칠 전에 그 감나무 하나에다 구멍을 파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었는데, 문득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이 떠올랐습니다. 없는 구멍을 뚫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며 남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나이는? 하던 일은? 생김새는? 그런데 남의 여자가 한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빙긋이 웃음 머금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제 작업실 주변에는 늙은 감나무들이 많습니다. 그 감나무들이 가지마다 뱉어놓은 연초록 이파리들이 요즘 장관입니다. 아마 감나무들은 올 가을에도 누가 따가지도 않을 감을 주렁주렁 매달게 되겠죠. 모든 열매는 나무들의 섹스로 만들어진 것. 수십 년 묵은 늙은 감나무에게도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게 마련이지요. 며칠 전에 그 감나무 하나에다 구멍을 파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었는데, 문득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이 떠올랐습니다. 없는 구멍을 뚫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며 남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나이는? 하던 일은? 생김새는? 그런데 남의 여자가 한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빙긋이 웃음 머금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제 작업실 주변에는 늙은 감나무들이 많습니다. 그 감나무들이 가지마다 뱉어놓은 연초록 이파리들이 요즘 장관입니다. 아마 감나무들은 올 가을에도 누가 따가지도 않을 감을 주렁주렁 매달게 되겠죠. 모든 열매는 나무들의 섹스로 만들어진 것. 수십 년 묵은 늙은 감나무에게도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게 마련이지요. 며칠 전에 그 감나무 하나에다 구멍을 파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었는데, 문득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이 떠올랐습니다. 없는 구멍을 뚫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며 남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나이는? 하던 일은? 생김새는? 그런데 남의 여자가 한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빙긋이 웃음 머금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앞산의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2007.11.09]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2007.11.09]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2007.11.09]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