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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수 실존인물,무사 백동수 실존인물, 야뇌 백동수 무예도보통지

ohmylove 2011. 7. 19. 23:51
백동수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실존인물입니다.




1743년에서 1816년까지 산 인물로서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인물입니다.

백동수는 양반의 서자였기에 신분상으로 서얼에 해당했습니다.

때문에 관직 진출에 상당히 제약을 받았습니다.

1789년에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후기의 무예 교본으로

각종 무예에 관한 자세한 그림, 해설 등을 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백동수는 장용영의 초관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군대의 하사급에 해당됩니다.

1806년 백동수는 조정의 탄핵을 받아 정배(멀리 섬이나 지방으로 보내 감시받으며 생활하게 함)되었습니다.

1810년 다시 관직이 제수되었고, 1816년에 7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조선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수원, 휘는 동수(東脩), 자는 영숙(永叔), 호는 인재(靭齋) 또는 야뇌(野餒)이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증 호조판서 충장공 백시구(白時耉)의 증손이며,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백사굉(白師宏)이고, 이덕무의 처남이기도하다. 조부인 백상화가 증조부 백시구의 서자였기에 신분상 서얼에 속하였다.
 
부호군 사굉의 아들로 1743년 탄생하여 1771년(영조 47)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1773년 기린협으로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등 오랜 낙백 시절을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부사용(副司勇)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 집춘영(集春營) 초관(哨官)을 거쳐 1788년(정조 12) 어영청(御營廳) 초관(哨官)을 역임하였다.
 
1789년(정조 13) 분수문장(分守門將)에 제수되고,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을 지내고, 이해 4월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90년(정조 14) 부사직(副司直)에 단부되고, 이해 6월 3일 훈련주부(訓鍊主簿)에 제수되었다.
 
1791년(정조 15) 훈련판관(訓鍊判官)에 제수되고, 1792년(정조 16) 충청도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역임하였다.
 
1795년(정조 19) 자궁(慈宮, 헌경황후 홍씨) 주갑(周甲) 탄신(誕辰) 진찬(進饌) 때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에서 훈련첨정(訓鍊僉正)으로 가설(加設)되었다.
 
1796년(정조 20)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를 거쳐 1802년(순조 2) 평안도 박천군수(博川郡守)에 제수되고, 파총(把摠)을 겸(兼)하였다.
 
1806년(순조 6) 영의정 이병모가 관서의 탐오(貪汚) 함을 아뢰길, "법을 왜곡하지 않고 뇌물을 받았다는 것으로 논하여 죄를 1천리 유형(流刑)에 그치었으나 원지 정배(遠地定配)한 다음, 이어서 금고(禁錮)의 전형을 실시하소서."을 청하자 순조가 말하기를, “해부(該府)에서 이미 도계를 보고 그 죄상(罪狀)을 알고 있으니 이같이 의율(擬律)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그대로 따라 경상도 단성현(慶尙道 丹城縣)에 정배(定配)되었다.
 
다시 서용되어 1810년(순조 10) 군기부정(軍器副正)에 제수되고, 1816년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출처 : 다음 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