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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바꾸는 지름길 M혁명 아닌 R혁명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2. 27. 20:27


북한 바꾸는 지름길 M혁명 아닌 R혁명


“라디오 심야 방송엔 묘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한 번 빠져들면 빨리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죠. 얼굴도 모르는 아나운서의 음성을 타고 오는 갖가지 사연과 소식, 그걸로 나는 세상과 소통했습니다.”

2009년 한국 땅을 밟은 탈북자 김남수(45)씨의 얘기다.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꾼 건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친구로부터 구입한 중고 라디오 한 대였다. 주파수가 고정된 채 보급되는 북한제 라디오와 달리 다이얼을 돌려가며 방송을 골라 들을 수 있는 중국제 라디오는 북한에선 소유가 금지된 ‘위험물품’이었다.

김씨는 라디오 케이스와 불필요한 부품을 뜯어내 버렸다. 남은 기판을 찬장 뒷면에 붙여 숨겨두었다가 밤마다 꺼내 이불 속에서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안방까지 불쑥 찾아오는 검열요원의 눈을 피해서였다. 처음 한동안은 아내도 라디오로 한국 방송을 듣는지 모를 정도로 조심했다. KBS 한민족방송과 극동방송, 미국의소리(VOA) 한국어방송 등을 통해 그는 조금씩 바깥 소식에 눈을 떴다. 심지어 북한 내부 소식조차 한국 방송을 통해 소상히 알게 됐다.

그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흐느꼈다. “40여년간 속고 살았다”는 회한 끝에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라디오에선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출연해 자신의 경험담과 탈북 경로까지 알려줬다. 6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돈을 모으고 중국어까지 익힌 뒤 그는 압록강을 건넜다. 각종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자 가운데 김씨와 같이 대북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 체제의 현실에 눈을 뜨고 탈북을 결행한 비율이 20%를 넘는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중동 민주화 혁명의 물결이 북한 못잖은 독재체제인 리비아까지 번졌다. 김씨와 같은 탈북자들이 중동 사태를 보는 감회는 남다르다. 과연 북한에도 ‘재스민 혁명’의 물결이 퍼질 수 있을까.

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주민들에 대한 통제 시스템이 굳건한 데다 중동 민주화의 촉매제였던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등의 보급이 미미하다는 이유에서다. 체제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 시위를 기획하고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도 컴퓨터 보급이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일반 주민들의 인터넷 접근은 원천 봉쇄돼 있고 철저하게 통제·관리되는 인트라넷 ‘광명망’에만 접속할 수 있을 뿐이다. 이집트 통신업체 오라스콤과 손을 잡은 ‘손전화’(휴대전화) 보급도 확산 일로에 있지만 여전히 일반 주민들과는 무관한 일이고 지역적으로도 평양 일원에 집중돼 있다. 개성공단에 수시로 왕래하는 관계자는 “평양에서 파견된 특구개발총국의 간부가 업무용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게 목격되긴 했지만, 4만여 명 공단 직원 가운데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만이 민주화 물결의 무풍지대로 남을 것이란 예상에 반론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다만 그 형태가 중동과 같은 모바일 혁명이 아니라 ‘라디오 혁명’으로 바뀌어 수 년 안에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25일 북·중 국경지대인 양강도 혜산에서 이집트 혁명 소식을 전파하는 전단이 뿌려졌다는 소식이 대북 단파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의 전파를 타고 송출됐다. 북한 내부 소식통이 휴대전화로 알려온 뉴스였다. 열린북한방송은 이 소식을 즉각 기사화하고 뉴스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내보냈다. 하태경 대표는 “북한은 정보 유통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며 “자생적 시위가 일어날 경우 이를 빨리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수단이 있어야 확산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을 대북 방송이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주파수를 바꿀 수 있는 라디오를 갖고 있을까. 열린북한방송 측은 탈북자를 상대로 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AM 라디오 100만 대, 단파 라디오 20만 대가 보급돼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북한 인구를 2400만 명, 평균 4인가구로 본다면 다섯 집에 한 집꼴로 밀반입 라디오가 있다는 뜻이다. 탈북자 김씨는 “어학공부 등의 목적으로 중국산 카세트플레이어 등이 유통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라디오와 일체형”이라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 소재 조사기관인 인터미디어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중국 내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 조사한 결과도 비슷하다. 이 조사에선 22.8%의 탈북자가 외국 방송을 청취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탈북자들은 유용한 정보로 ‘돈벌이에 관한 정보’(87%, 복수 응답), ‘중국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정보’(35%)를 꼽았고 ‘북한 소식’(35%)을 꼽은 비율이 ‘남한 소식’(27%)보다 더 높았다. 방송 청취 시간대는 오후 10시에서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심야시간대가 압도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라디오의 역할’을 증폭시킬 수 있는 여지를 높인다. 현재 국내에서는 AM 전파로 내보내는 KBS 한민족방송과 선교방송인 극동방송 이외에 민간 대북방송이 4곳 있다. 이 가운데 북한 내부 사정을 직접 취재해 알리는 것은 민간 대북방송의 몫이다. 민간 대북 방송이 “며칠 몇 시에 어디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하면 북한 주민에게 휴대전화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민간 방송들에는 AM 주파수가 할당되지 않아 수신기 보급률이 낮은 단파로 보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열린북한방송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춘천MBC의 전파를 빌려 새벽 시간대에 한 시간씩 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있다. 그랬더니 함경도 신포에서 방송을 들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대북전단 살포와 함께 라디오수신기를 풍선에 묶어 날려 보내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디오보다 못하지만 달러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에서 북한 내부 소식통과 자주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 탈북자 이모씨는 “이미 많은 북한 사람이 중동 사태를 알고 있는데 이는 달러 환전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한족 등 북한을 드나드는 장사꾼들이 북한 내 파트너들에게 달러를 팔아 위안화나 북한 원화를 살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할 것인지를 협의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동 사태를 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소식은 장마당을 통해 북한이 자랑하는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휴대전화처럼 쌍방향이 아닌 일방 통행식 정보 유통이어서 ‘상황 전파’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

  문화복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