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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공화국, 대한민국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25. 22:35


  
과거공화국, 대한민국


한겨레 사회부 24시팀 기자.      편집 / 문화복지신문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년, 4월 민주화운동 50년, 전태일 열사 분신 40년, 광주민주화운동 30년. 2010년 한국은 ‘역사의 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지금이 조선시대고 일제강점기라면 모를까,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임진왜란 몇 백 년이라든가, 대한제국 몇 백 년이라든가, 3·1 운동 몇 십 년이 라든가를 기억하고 기념하진 않는다. 역사란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현재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 인위적인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걸러진 역사도 이 법칙에 따라 또 한 번 걸러진다. 왜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분개하는데도, 서울시는 정작 경술국치가 맺어진 장소를 보존하지 않을까. 왜 전쟁은 비극이란 걸 모두가 알지만, 정부는 전쟁의 비극 속에 자국의 군·경에게 학살당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는 공식적으로 지내지 않을까. 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광주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한걸 알면서도, ‘전비어천가’는 계속 불릴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제는 초등학생 때부터 배우는 그 시절 이야기는 여전히 한쪽면만 부각된 미완의 역사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 전쟁에, 군과 경찰에 부모와 가족을 잃은 이들이 이 사회에 넘쳐난다. 그 어느 누구도 이들의 상처를 돌보지 못하는 동안 100년, 60년, 50년, 40년, 30년은 흘러도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다.

 올해로 65세인 김금순씨. 손자·손녀를 볼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김 씨가 태어난 1945년, 아버지 김포덕(당시 33살)씨는 일제의 강제동원을 피해 다니다 결국 임신 3개월인 어머니를 두고 끌려갔다. “일본 정부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비참함과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제 심정을 짐작이나 할까요?” 김씨와 아버지의 시간은 여전히 1945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등 식민지가 남기고 간 흔적은 이제 겨우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남은 이들의 삶이 더딘 진실규명을 기다릴 만큼 길지 의문이다. 김씨 등은 지난 7일 일본을 찾아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 증언집회’에 참여했다. 유골조사와 봉환사업,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자료 공개, 피해자 배보상 법 제정 등의 요구는 몇 년째 일본의 답없는 외침이다.

 “아빠, 엄마. 저 왔어요.” 60이 훌쩍 넘은 노인이 77명의 영령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으며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 어머니란 말을 해 본적이 없는 그에겐 아빠, 엄마가 여전히 익숙한 말일게다. 그마저도 공개적으로 부모님을 추모할 자리는 60년 만이었다. 지난 11일 열린 ‘아산 희생자 위령제’에 참가한 유가족들은 여전히 1950년을 산다. 그들은 1950년 가족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까지 통째로 잃어버렸다.

 지난달 28일 ‘9·28 서울수복 및 국군의 날 행사’가 광화문 광장에서 화려하게 열렸을 때 이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정부는 한국전쟁 60년을 ‘선진국 원년의 해’로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북이 우후죽순 밀고 내려오던 전세를 남이 뒤바꾼 사건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을 정부차원에서 기념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월미도 초토화 작전 중 월미도 원주민들이 미군 폭격으로 숨졌고, 서울 수복 뒤에는 ‘부역자’를 처벌한다며 임의로 부역자와 그 가족을 찾아내 죽였다. 하지만 정부는 9·28 서울수복의 ‘눈부신 성과’만 말했지, 그 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은 외면했다. 정부가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한 부역자 학살 사건만도 194건에 달하는데도 말이다.

 한국전쟁 피학살 유가족의 정부의 사과, 배보상법 제정, 과거사 재단 등 위령 시설의 건립이란 요구도 몇 년째 한국의 답없는 외침이다.

 그나마 진실규명도 되고 법적 보상도 진행된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떨까. 우리는 이미 ‘역사가 된 과거’라고 생각했던 그 일은 여전히 누군가에겐 현재였다. 지난 9월 14일. 지아무개(56)씨는 제초제를 마셨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을 앓았던 5·18 유공자였다. 살아남은 그를 기다린 건 우울증, 불면증, 신경통…. “꿈에 항상 군인들이 나타나 살 수가 없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5·18 국립묘지에 묻어주십시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였다. 진실이 규명돼 유공자로 인정받은 그의 시간도 1980년에 멈춰있었다.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년, 4월 민주화운동 50년, 전태일 열사 분신 40년, 광주민주화운동 30년. 이미 너무 오래된 지나간 과거처럼, 이미 다 해결된 문제인 것처럼, 가슴 아닌 머리로 기억하는 박제된 역사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한국정부는 꿈쩍도 않는 일본은 비판하면서도 “이미 지난 일”이라며 진실규명과 피해보상 요구를 외면하고 있을 테고,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라며 이들을 외면한 채 자랑스러운 일들만 강조하는 게 아닐까. 더구나 이젠 과거에 묻힌 일이 아니라 국가가 만든 과거사 위원회에서 진실이 규명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 2010년 아닌 과거를 사는 이들이 많은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