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패티김 음악인생 50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5. 08:04


Special패티김 그녀의 Stage, 인생의 Stage
1958년 가을 어느 날의 오후.


명동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만난 오빠의 친구로부터 '너 노래 잘하지? 오디션 볼래?'고 시작된 그 하루의 필연 같은 우연이 우리 대중음악의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걸출한 디바의 전설을 쓰는 첫 페이지 였다. 그 후로 오늘까지 만 52년 동안 콘서트 무대에서 현역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패티김이 말하는 '노래하는 무대'와 '인생으로서의 무대'에 대하여 직접 들어 본다.

Interview. 1스무 살 처녀 용감하게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처음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금이야 워낙 가수를 포함한 모든 연예인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런 직업이었지만 그 당시야 뭐 그저 노래를 좀 부를 줄 아는 정도였지 직업적인 가수로서 꿈을 키우고 그러지는 않았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상 대학을 진학할 형편이 아닌지라 시쳇말로 하면 취업 백수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명동 거리에서 우연하게 오빠 친구인 기타리스트 곽준용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취업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너 어렸을 때 노래 잘했는데 가수 한번 해볼래?'하더라구 그 순간 막혀 있던 귀가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죠. 왠지 캄캄한 밤길을 걷다가 환한 불빛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야말로 길거리 캐스팅 같은 거겠죠.

그럼 무대에 바로 서게 되셨나요?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바로 무대에 섰겠어요. 곽준용씨가 주선한 오디션이 당시 유명한 미8군 전문쇼단인 ‘베니킴쇼단’의 단장인 베니킴(본명:김영순)씨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었어요.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홈가운을 걸치고 나와 노래 한 곡 불러볼 테냐고 묻기에 자신 있게 학창시절부터 즐겨 부르던 'You don't know me'와 'Memories are made of this'를 부르겠다고 했는데, 글쎄 베니킴이 연주하는 피아노 반주보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박동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고, 가사는 가물거리고 열이 달아올라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두 곡을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게 끝나자 베니킴씨가 나를 바라보더니 '노래 차~암 잘 하네' 하시더라고. 하하..그 길로 '베니킴쇼단'의 수습생이 되어 '화양연예주식회사'로 출근을 하게 되었죠.
수습생으로 주말이면 서울 인근의 파주, 문산, 오산, 수원 등 미군 부대로 공연하러 다녔고 수습생들은 선배 단원들을 무대 뒤에서 보조해주거나 공연하는 무대를 분위기를 익혔어요.

수습생활이 채 석 달이 안되어서 쇼단의 간판스타였던 이해연씨와 듀엣을 부르는 무대가 주어졌어요. 이해연씨는 당시 후배 단원들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었고, 나 같은 수습단원에게는 '하늘의 별'이었죠. 나중에 이해연씨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그런 이해연씨와 듀엣으로 피날레 곡을 부르게 됐다는 것에 대단한 자긍심이 생겼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고 기분 좋은 일인지를 처음 알게 된 무대였고, 운명적으로 내가 계속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던 무대였어요.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미8군 무대가 갖는 영향력이 적지 않은데요, 어떤 무대였습니까?
    
미8군 무대라는 것이 결국 한국에 파병된 미군을 위한 사교클럽 스테이지인거죠, 아시다시피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불모지가 되어버리고 나서 재건에 힘을 쏟을 때이니까, 사회적인 기반 시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열악하겠어요, 그러니 문화라는 것도 그 기반이나 여력이 형편없을 때였죠. 그런 시기에 미군들을 위한 무대라는 것이 결국 그들의 음악과 문화로 쇼의 레파토리를 만들어서 보여주게 되는 것이었죠. 외국 팝을 리메이크나 혹은 이미테이션하는 것이 당시의 수준으로, 대략 30여 명 구성으로 솔리스트, 밴드, 댄스팀 등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어야 했어요.
'화양연예주식회사'는 그런 쇼단이 30여 개가 소속된 넓은 범위의 프로덕션이라 할 수 있었죠. 그리고 분기마다 전국의 미군클럽 매니저 700~800명이 가득 찬 클럽하우스에서 각 쇼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참신한 의상과 음악, 안무로 새로운 쇼를 선보이게 되죠. 이게 등급을 심사하는 까다로운 심사로 등급이 낮아지면 같은 쇼를 해도 개런티가 적어졌고, 제일 낮은 등급을 받는 쇼단은 심지어 몇 개월 동안 쇼를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단원이었던 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야말로 실력으로 진검 승부를 해야 하는 그런 살벌한 경쟁이 살아 있는 곳이었던 거죠. 저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현미, 최희준, 위키리, 김시스터즈, 윤복희, 한명숙씨 같은 분들이 있었고 밴드로써는 신중현씨 같은 분들이 있었죠. 그 후로 많은 후배가 미8군 무대를 통해서 활동을 시작한 경우가 많았어요. 조용필, 김추자 같은 걸출한 후배들이 대표적이겠네요. 비록 남의 나라 군인들을 위한 무대였지만 우리 대중음악에는 좋은 자양분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리사이틀이라는 단어를 대중음악 공연에 처음 사용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렇죠. 1960년 12월에 일본 NHK 초청으로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정식수교가 되기 이전이라 일본 출국이 정말 쉽지 않을 때였는데,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당시 일본은 주로 엔카와 재즈가 성행을 할 때였기에 저처럼 스탠다드 팝을 하는 아티스트가 경쟁력이 있었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량이랄까 성대라고 할까, 목청이 끝내주잖아요. 그래서 좀 맘껏 소리를 뽑아내면서 기죽지 않고 활동한 덕에 제법 인기를 얻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1962년 말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하자고 요청이 왔고, 출국 전에 입국했더니, 극장 '피카디리' 개관 기념으로 '쇼'를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쇼'라는 말보다는 '리사이틀'로 해달라고 했죠. 사실 '리사이틀'(Recital)은 클래식 분야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한 사람이 독창하거나 독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단어를 내가 쓰겠다고 하니 좀 당황스러웠겠지 주최 측에서는, 뭐 그래도 내가 쓰겠다는데 일단 통과하고, 극장을 가보았더니 정말 그냥 영화관인데, 내가 출연자 대기실에서부터 만들어 달라고 하자 허름한 창고를 고쳐서 대기실로 만들 정도였으니 참으로 기반 시설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만한 일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내 이름을 건 최초의 리사이틀 무대가 되었고, 공연이야 성황리에 마치게 되었지. 아마 그 후로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곧잘 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한국에서 활동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1963년 3월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어요, 처음 데뷔는 호텔의 라운지 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다룬 브로드웨이 뮤지컬 'Flower Drum Song'에 출연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일본에서야 차별화된 성량으로 그들보다 우월한 무대를 뽐낼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저 평범한 가수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뮤지컬을 통해서 새로운 무대에 도전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본격적인 브로드웨이 무대를 도전하기 위해서 1년 8개월이 지나서 뉴욕으로 가게 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대단히 높은 벽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 같은 아시아계 가수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나 무대가 많지 않았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고국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함께 있으면 마음의 안정도 갖고 좀 더 도전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함께 살 아파트까지 장만하는 등 그런 준비를 마칠 즈음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귀국하게 되었죠. 그때가 1966년 2월이었어요.

귀국하신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 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이 번쩍번쩍하더니 여기저기서 플래시 불빛이 터지는 것에요. 너무 놀라서 어리둥절했지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위독한 어머니를 뵈러 가는 게 급선무이니까 서둘러 병원으로 갔지요. 그런데 상황을 파악해보니 출국 전에 불러서 녹음해놓았던 'Till'과 'Padre', 그리고 ‘초우’가 그야말로 빅히트가 되었던 거에요. 가수는 없는데 노래만 히트가 된 셈이죠. 요즘 말로는 얼굴없는 가수라고 해야 하겠죠. 자연스레 신비주의가 된 셈이지만, 그날로부터 방송 출연이 끊임없이 섭외가 들어오고 정신이 없었죠.
당시에 TV방송국이 막 출범을 해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현미', '최희준'씨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더군요. 마침 길옥윤 선생도 모친이 위독하신 관계로 귀국해서인지 젊은 여가수와 젊은 연주자로서 언론에서 좀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딱 맞는 커플 이었지요. 그렇게 몇 개월 활동을 하다가 그해 5월 미국으로 출국을 하려고 계획을 했지만 길 선생이 작곡한 ‘4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음반으로 녹음을 하고 활동하다 보니 차일피일 체류기간이 길어졌고, 한편으로 편찮으신 어머니와 떨어져서 또 혼자만의 외로운 외국 생활과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미국 쇼 비즈니스에 대한 막막함도 느껴져서 길 선생의 프러포즈를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이니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가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이고 LP 음반으로 녹음하여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하게 된 시기였어요. 그리고 공연이라는 것은 여전히 그리 좋은 형편이 아니었죠. 당시 시민회관 같은 곳에서 하루에 공연을 4회씩 하던 때였어요. TV 같은 것은 일반 대중들이 보유하기엔 좀 고가의 제품이었기에 대중들이 문화를 즐길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으니까. 하루에 4회 공연을 해도 전좌석이 매진되던 때였죠. 그만큼 문화를 공급할만한, 또 감상할 수 있는 인프라가 그리 좋은 형편이라 할 수 없었던 때죠. 그러니 그저 몸을 부단히 움직여서 대중과 만날 수밖에 없었죠.

  미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한국에서 활동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1963년 3월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어요, 처음 데뷔는 호텔의 라운지 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다룬 브로드웨이 뮤지컬 'Flower Drum Song'에 출연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일본에서야 차별화된 성량으로 그들보다 우월한 무대를 뽐낼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저 평범한 가수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뮤지컬을 통해서 새로운 무대에 도전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본격적인 브로드웨이 무대를 도전하기 위해서 1년 8개월이 지나서 뉴욕으로 가게 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대단히 높은 벽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 같은 아시아계 가수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나 무대가 많지 않았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고국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함께 있으면 마음의 안정도 갖고 좀 더 도전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함께 살 아파트까지 장만하는 등 그런 준비를 마칠 즈음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귀국하게 되었죠. 그때가 1966년 2월이었어요.

귀국하신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 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이 번쩍번쩍하더니 여기저기서 플래시 불빛이 터지는 것에요. 너무 놀라서 어리둥절했지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위독한 어머니를 뵈러 가는 게 급선무이니까 서둘러 병원으로 갔지요. 그런데 상황을 파악해보니 출국 전에 불러서 녹음해놓았던 'Till'과 'Padre', 그리고 ‘초우’가 그야말로 빅히트가 되었던 거에요. 가수는 없는데 노래만 히트가 된 셈이죠. 요즘 말로는 얼굴없는 가수라고 해야 하겠죠. 자연스레 신비주의가 된 셈이지만, 그날로부터 방송 출연이 끊임없이 섭외가 들어오고 정신이 없었죠.
당시에 TV방송국이 막 출범을 해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현미', '최희준'씨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더군요. 마침 길옥윤 선생도 모친이 위독하신 관계로 귀국해서인지 젊은 여가수와 젊은 연주자로서 언론에서 좀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딱 맞는 커플 이었지요. 그렇게 몇 개월 활동을 하다가 그해 5월 미국으로 출국을 하려고 계획을 했지만 길 선생이 작곡한 ‘4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음반으로 녹음을 하고 활동하다 보니 차일피일 체류기간이 길어졌고, 한편으로 편찮으신 어머니와 떨어져서 또 혼자만의 외로운 외국 생활과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미국 쇼 비즈니스에 대한 막막함도 느껴져서 길 선생의 프러포즈를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이니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가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이고 LP 음반으로 녹음하여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하게 된 시기였어요. 그리고 공연이라는 것은 여전히 그리 좋은 형편이 아니었죠. 당시 시민회관 같은 곳에서 하루에 공연을 4회씩 하던 때였어요. TV 같은 것은 일반 대중들이 보유하기엔 좀 고가의 제품이었기에 대중들이 문화를 즐길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으니까. 하루에 4회 공연을 해도 전좌석이 매진되던 때였죠. 그만큼 문화를 공급할만한, 또 감상할 수 있는 인프라가 그리 좋은 형편이라 할 수 없었던 때죠. 그러니 그저 몸을 부단히 움직여서 대중과 만날 수밖에 없었죠.

이력을 보면 유독 최초라는 타이틀이 많이 붙는 것 같습니다. 어떤 활동들이 있었나요?
    
글쎄요, 아무래도 좀 도전적인 저의 성격과 닿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일본이나 미국 같은 미지의 세계로 나가려는 성향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래도 전통가요가 아닌 팝적인 음악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966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같은 것은 아무래도 미국에서 뮤지컬 경험을 했던 것이 가장 크게 작용을 했고, 1978년 기존 시민회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으로 개관했을 때 아마 대중음악공연으로는 처음 공연을 했어요. 1985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우리나라 대중가수로써는 최초로 협연했었죠. 그리고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을 미국 뉴욕 카네기 콘서트홀에서 공연하기도 했고, 그밖에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라든지 일본 NHK-TV 초청 공연을 1991년에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88 서울올림픽을 치루고 나서 해외 공연을 더 자주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만큼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가 좀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Interview. 2무대 인생 50년의 의미

  무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무대라.. 무대라는 것은 진정한 나를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요. 삶이란 또 인생이란 참 굽이굽이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야 하는 오랜 역정이에요. 좋은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기나긴 길인 거에요. 마치 인생과 무대는 비슷한 것인지 몰라요. 그래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 열심히 나 자신을 가다듬고 최상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내하고 노력해야 하는 거죠. 무대 아래 관객들이 기대하는 '패티김'을 보여주기 위해서 맛있는 것도 참아가며 때론 배고픈 것도 참아가며 몸매도 유지해야 하는 거고 술이나 담배같이 목에 유해한 것은 당연히 금기해야 하겠죠. 또 두 시간 이상 무대에서 버티고 서기 위해서 그만한 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운동을 꾸준하게 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나의 모든 일상은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가 되었죠. 요즘도 한 주에 운동하는 양이 정해져 있어요. 수영, 산책, 요가를 정해진 일정에 맞춰서 하죠. 아, 그리고 올 초부터 살사댄스를 배우고 있었는데 지난번 공연에서 발목을 접질려 최근에는 못하고 있어요. 아쉽네! 그건. 결국, 아티스트로써 내 무대를 찾는 관객의 소중한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되새기는 중요한 포인트인 거죠.

철저하게 관리를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역시 나 자신이 하나겠고, 또 하나는 가족이겠죠. 데뷔 30주년 맞이한 해였던 것 같아요. 이유 없이 눈물이 많아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오기도 하고 한없이 우울해져 무엇이든 하기 싫어지기도 하는 등 그 증상이 심각해져만 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갱년기 증상이었던 거에요. 많은 여성분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이지만, 유독 난 나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아주 혹독하게 보냈죠. 심지어 무대 공포증이 생길 정도였어요. 어느 정도였느냐면 내일이 공연이면 내일 당장 전쟁이라도 나서 내 공연이 취소라도 되길 바랐을 정도였다니까. 하하..
거의 4년간을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상담을 해준 스님이 이젠 좀 나를 살짝 내려놓아도 된다고 하시더라고. 아마 나이가 든다는 거, 나에게 변화가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 때문에 힘들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좀 더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기 시작했지 그러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그리고 가족 중에 특히 두 딸에게 제일 미안하죠. 직업이 가수인 엄마 덕에 함께 있을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미안했어요. 그래도 엄마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해주고 싶어서 두 딸에게 모유 수유는 꼭 해주었어요. 그러다 보니 TV 프로그램 녹화를 중단하고 수유를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기도 했죠. 첫째가 출산을 해서 산후 조리를 위해 유명 요리 선생님에게 미역국 끓이는 비법을 사사 받아서 뒷바라지도 하게 되고 특히 큰사위가 이상하게 멸치볶음을 좋아해서 꼭 그것은 내가 해주고 있지. 아무래도 성장기에 함께 많은 시간을 못해준 첫째에게 좀 마음이 쓰이고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들죠. 뭐 보통의 엄마 마음들이 그렇지 않겠어요.

지난 2008년이 데뷔 50주년이셨는데 어떤 감회이셨나요?
    
50년 동안이나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팬들이 있다는 것에 우선 감사했죠. 고맙고. 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뿌듯함 같은 것인데.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참 대견하다 하면서 칭찬해줬어요. 하하 30주년 때 내 인생목표가 목소리도 좋고 건강도 좋고 체격도 그때까지는 자신만만하니 내 다음 목표, 도전은 40주년이다. 40주년 바라보는데 나로서는 음성이 점점 만족해졌어요. 40주년을 정말 잘 마쳤어요. 그리고 또 자신이 생기더군요. 이 상태로 잘 노력하고 관리하면 되겠다 싶더군요. 20대 목소리는 내가 지금 들으면 어머 참 맑고 예쁘다지 멋있다는 아니거든요, 40대 들어서고 5,60대 되면서 너무만족스럽고. 내 성량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사랑은 영원히'의 키가 Em인데. 아직도 똑같은 키로 노래 하고 있어요. 가수들은 나이가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음의 폭이 조금씩 내려가죠. 어떤 노래는 녹음할 때 너무 하이로 불러서 반음 내리기도 하죠. 하지만 '사랑은 영원히'는 나의 대표곡 같은 곡인데. 30년 40년 후에도 아직도 똑같은 키로 노래한다는 것에 나 자신은 굉장한 긍지를 갖게 해 주죠. 50주년 기념공연으로 전국투어콘서트를 33개 도시 60회를 공연했어요. 아직 현역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에 뿌듯함도 느껴지고 또 그런 열정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나 자신에게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Interview. 3멈추지 않는 도전과 열정 - 2010년 공연

이번 콘서트의 공연 타이틀이 'Passion'입니다.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신 건가요?
    
사실 제 공연은 매번 공연의 컨셉을 달리하고 있어요. 2006년에는 '객석으로'라는 타이틀로 좀 더 팬들에게 다가가는 공연을 만들고자 했고요. 2008년에는 '50주년 꿈의 여정 칸타빌레'라고 좀 기념비적인 타이틀을 썼죠. 그리고 2년 만에 공연을 기획하면서 'Passion' 즉 '열정'이라는 컨셉으로 좀 더 열정적인 공연을 만들어 보려고 했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노래 인생이 항상 도전해가는 모습이고, 열정을 담은 노래로 인생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근래에 삶을 비관하고 스스로 나약해지는 모습을 사회 일각에서 너무 자주 접하게 됩니다. 자살이 많은 사회를 보면서 어른으로서 참 안타깝고 아쉽고 그렇더군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삶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돌파해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보시면 될 것이에요. 그래서 공연장에 오신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넘치는 저의 열정을 느끼고 기를 좀 받아가시라 권하고 있답니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에요. 내 마음속에 담긴 열정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미리 앞서서 나이 때문에 못하고 자꾸 핑계를 만들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이번 콘서트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 인가요?
    
우선 무대와 음악이 이전 콘서트 보다 좀 파격적이지 않나 싶어요. 최근에 공연은 무엇보다 영상이 많이 강조되고 있고, 무대 장치가 과거보다 많이 화려해지고 퍼포먼스가 많이 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오랜 시간 활동한 사람의 콘서트는 자칫 좀 무료하고 심심할 것 같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런 이미지를 깨기 위해서 저희 공연 연출 팀들과 많이 연구하고 항상 좀 색다른 무대를 보여주려고 해요. 음악적으로는 데뷔 초기에 히트되었던 '내 사랑아', '인생은 작은 배', '사랑하는 당신이', '담디담디담' 같은 곡을 스윙이나 라틴리듬으로 리메이크해서 아주 유쾌한 편곡을 했죠. 그리고 기존 히트곡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이별', '사랑은 영원히' 같은 곡은 그에 맞는 적절한 퍼포먼스를 준비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콘서트 오프닝을 지난 50주년 콘서트에서는 8m 상공에서 달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번에도 역시 비슷하지만, 공연 컨셉에 맞는 연출로 아주 만족할 만한 오프닝 무대를 만들었죠.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무대를 기약하시나요?
    
앞으로 제가 서게 되는 무대는 규모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관객과 잘 소통하는 무대였으면 해요. 이제는 무대 위의 사람이나 객석의 팬들이 같이 세월을 이해하고 함께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시피 친구 같은 사이인 거죠. 나로 말미암아서 용기와 힘을 얻는다면, 나도 팬들로부터 또한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이름만 패티김 콘서트인 거지 그 무대의 주인공은 사실 객석에 앉아 있는 팬들 스스로인 것 같아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닿아서 함께 행복해지는 그런 무대이길 바라는 거죠. 오랜 시간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지지해주시고, 사랑해 준 팬이자 친구들에게 무한하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패티김 음악인생 50년


박정희 bjh57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