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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30년] 지워지지 않는 상흔 - 진압군 병사의 고통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5. 11. 13:36


[광주항쟁 30년] 지워지지 않는 상흔 - 진압군 병사의 고통



#지난 1일 오전 7시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50대 초반의 남자들이 하나 둘 모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고려대 정경대 77학번 동기들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버스가 경기도 죽전에 이르렀을 때 다른 동기생 한 명이 탑승했다.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갑게 맞았다. 손 인사를 하며 멋쩍게 자리에 앉는 동기생은 1980년 5월 광주의 일로 지난 30년간 형극의 삶을 살아온 김동관씨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광주 진압군중 첫 국가유공자가 된 사람이다. 진압군 병사의 고통을 30년 만에 나라에서 공식 인정한 셈이다. 이날 여행은 김씨의 해원(解寃)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주선한 자리다. 유공자가 되었다고 해서 잃어버린 청춘이 돌아올 리 없지만, 친구들은 김씨와 함께 보냈던 학창시절을 화제로 삼으며 위로를 했다.

김동관씨가 지난 1일 친구들과 함께 버스여행을 하던 중 충남 당진 송악면 한진 포구에 들러 지나온 30년을 회상하고 있다.

1977년 유신독재가 말기증상을 보이던 때 대학에 입학한 김씨는 자연스레 학생운동과 접하게 된다. 당시 시국상황과 그에 저항하는 것이 존재이유였던 대학문화는 그를 ‘고전연구회’라는 서클로 이끌었다. 서클 내부에서는 치열한 학습과 논쟁이 이어졌고 학생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던 김씨는 그런 생활이 싫었다. 그는 “고대에 특히 데모가 많은 것도 (싫고) 그랬지만, 그 때는 대학 캠퍼스에 성북경찰서 형사들이 상주하던 시절이었다”며 “반○○ 형사라고 지금도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는데, 장학금 주겠다고 접근해서는 첩자 노릇하라고 꼬드기는데, 그 꼴 보기 싫어 군대에 갔다”고 말했다. 79년 5월 입대한 그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돼 특전사령부 제3공수여단으로 배속받았다.

그해 9월 서울 거여동의 3공수여단 면회실로 찾아간 대학동기들은 예상과는 다른 친구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황남준씨는 “동관이가 공수부대원의 우상인 ‘막타워의 왕’이 됐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면서 “곱상하기만 했던 애가 험하기로 소문난 공수부대 훈련에 빨리 적응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 때의 활달했던 친구 모습을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다시 보지 못하고 있다.

3공수여단은 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을 성공리에 진압한 경험을 바탕으로 80년 5월20일 광주에 투입된다. 3공수 부여단장 부관실 소속의 전령병이었던 김씨도 광주로 향했다. 이것이 그의 나머지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80년 광주때 일을 묻는 기자의 물음에 김씨는 찡그리며 말했다. 아픈 기억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 후의 얘기는 어렵지 않게 털어놓았다.

“상병되고 병장되고 하니까 얼마나 술이 잘 들어가는지. 소주 한 병은 그냥 한 모금이었어요. 속병이 났죠. 나중에 맥주 한 잔을 못마실 정도가 됐으니까. 그 때는 나를 건드릴 사람도 없었고….”

그가 다시 떠올리기 꺼려 하는 기억들을 친구들이 대신 설명해줬다. 김씨가 최근 건강이 좋아지면서 친구들에게 당시 일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같은 서클 멤버였던 황남준씨는 “특전사 동료들이 버스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했던 일, 눈에 총알을 맞은 운전수의 심장이 뛰더라는 얘기, 시신을 전남대 나무 밑에 암매장한 일 등을 말하며 분노에 찬 얼굴이 되곤 한다”고 전했다.

광주 이후 김씨는 부대에 복귀해 어렵사리 제대를 했지만 광주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82년 봄 복학도 했지만 친구들과 같은 대학생이 될 수 없었다. 환청 때문이었다.

“네가 시민들한테 총 갈겼지? 나는 다 봤다.”

아무리 안 쐈다고, 나는 안 쐈다고 소리질러도 소용없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랑 최세창 여단장이랑 무전으로 무슨 얘기했는지 넌 다 알잖아.” 마음 속으로 하는 모든 생각이 고스란히 귀로 되돌아왔다. 냉수를 가득 받은 욕조에 머리를 담그면 잠시 사라지는가 싶어도 조금 지나면 다시 괴롭혔다.

“머리 위쪽에서 소리가 계속 들려 천장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어요. 위층에서 누군가가 괴롭히는 것 같았죠. 그 때 우리집이 여의도 광장아파트 8층이었는데 괴롭히는 누군가를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칼을 들고 9층에 올라갔어요.”

이 일로 그는 혜화동의 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됐다. 그후 25년간 경희의료원, 강남성모병원, 고대 병원, 용인정신병원 등을 들락날락하는 환자 신세가 됐다. 첫 입원을 한 이듬해인 83년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되셨으니까, 그게 죄송해서 마치 옛날 3년상 치르듯이 3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괴로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91년 교회에 다니던 어머니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하며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음주, 폭언, 폭행이 계속되면서 정신병원 입·퇴원이 반복됐고 결국 2002년 합의이혼을 하게 됐다. “아들과 아내에게 짐이 되지 않아 홀가분하다”는 그는 지금도 이혼이 서로를 위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복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