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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국인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21. 14:26


    

    자랑스런 한국인

 

  해외에 있는 우리동포들은 누구나가 한결같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잉태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의 하늘아래에서  고국의 향수를 못잊어 고독과 싸우는 외로움 만큼이나 어찌말로
  다 형언 할수 있겠는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업종에서 다재다능을 보이며   애국하는 이들은 진정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가고  우리의 앞날의 미래 발전을 무궁한 영광과 함께 보여주며 리드하고 있다.
    여기 자랑스런 교포 이경한씨를 그중 한사람으로  문화복지신문사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선정하고  
    독자들에게 알리려 한다.
    
  
  재미교포 이경한 (앤드루- 리    수기문 중에서)

Toccoa Little League board of Director, Webmaster (www.toccoa.net). Senior League Southern Regional Tournament Committee, NCAA Tennis No 1 Fan, Piedmont College 서포터 상 여러 차례 수상, Clemson University Gate Farr 상 수상, 대한민국 출생. 믿음에 충실한 부모님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후 10년간 한국에서의 교육사업를 했으며 심한 고혈압과 당뇨 때문에 1997년 1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국의 조지아주 Toccoa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기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의 길인지 미국으로 이주한 후부터는 더더욱 부담을 안게 되었다. 형제 친척 지인조차 없는 낯선 이곳 미국생활은 힘든 일이었다. 언어, 피부, 인종도 다르고 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느꼈다. 이주해 온 지 얼마 안 돼 소개받은 목사님의 안내로 Toccoa 에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날 저녁 시내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차를 서행 운전하였다. 적어도 처음 길을 익히고자 노파심에 나온 길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바로 뒤의 차량은 답답했었는지 내 차를 들이받았다. 꽝 하는 소리에 멈추어 보니 한 여성은 내게 대뜸 여기 보험카드 있으니 알아 처리하라고, 당당히 말하는 게 아닌가? 적어도 미안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어쩌랴 그냥 됐다면서 집으로 되돌아가며 느낀 점은 어떻게 저들과 호흡하며 평생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밤을 새웠다. 하루 이틀 지나 몇 날이 지나고 나는 가까운 곳 공원에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어느 교회에서 야외예배 나온 그룹이 있었는데 그 무리 중 어느 어린아이들이 다투고 있어서 잠시 멈춰 말렸다. 그런데 얼마 후 두 명의 사복 경찰이 나타나 내게 신분증과 몇 가지 질문을 해 왔다. 이유인즉 야외예배 나온 부모 가운데 한 분이 경찰에 신고해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 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며 왜 나를 경찰에 신고했다는 말인가? 내 비록 좋은 인상의 소유자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내 평생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혐오감을 줄 만한 인상은 아니었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한 마디로 누구한테 한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 돌아오면서 깊은 고민에 빠져 한동안 깊은 실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이들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하며 이곳 주민과 동등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론 나보다 더한 어려움으로 살아갈 교포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길 원했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위한 길이며 내 가족과 내 민족과 그리고 내가 머무는 이 나라를 위한 길일까 두고 심각하게 기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인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토코아 리틀리그(Toccoa Little League Baseball & Softball)외의 만남

내가 사는 아파트는 동네 야구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있는 곳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야구장에 많은 어린이와 학부형들이 모여 개막식 행사인가를 하고 있었다.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내려가 행사를 지켜보게 되었다. 야구 복장을 한 어린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눈에 들어왔으며 참 낯선 풍경이었다. 날 이상한 눈으로 보며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으며 몇 가지 질문을 내게 했지만, 그저 하이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나 그곳에서 야구경기가 있었다. 나는 다시 내려가서 경기를 지켜보며 잘하는 선수를 향해 박수로 응원했다. 경기 마친 후 몇몇 선수들이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다음 번 경기에도 또 응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와우... 내게는 색다른 경험이긴 해도. 이렇게 아이들과의 만남은 그들과 함께 살 수 있겠다는 생각 하게 됐고 그 다음 경기 그리고 계속되는 경기에도 열심히 박수로  응원하며 그들과의 만남을 더욱 자주 가질 수 있었고 그들 또한 내게 깊은 관심과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계속되는 만남 끝에, 그들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그곳 회장에게 양해 얻어 그날의 경기결과를 매일 밤 정리해서 선수 사진과 함께 게시판에 게시하면서 점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들도 좋아했고 나도 좋았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내게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나 역시 그들과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운동장 관리하는 코치 임원들과 함께 일하며 친분을 쌓게 되었고 시즌 끝날 즈음엔 그들과 융화되는 삶을 살고 싶어 이웃 County의 올스타 경기에도 함께하며 내가 사는 지역 Toccoa Little League 위해 열심히 응원했다. 적어도 내게는 큰 희망의 순간이었다. 비록 몸은 괴롭고 힘들었지만 이런 봉사를 통해서, 이곳 지역사회 더 나가 미국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노력했으며 그러던 중 이웃에 있는 Toccoa Falls College를 알게 되었다.

이웃 학교와의 만남

어느 날 Toccoa Falls College를 찾아가게 되었으며 그곳 배구, 농구, 야구 그리고 축구팀에도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응원했으며 그 결과 대학 관계자들 그리고 학생들 간의 사귐도 시작되었고 그곳 학생들에게 영어도 배우고 난 그들에게 한국어도 가르칠 수 있었다.

나름 열심히 했다. Home, Away 경기 가능하면 빠짐없이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의 경기 결과에 연연치 않고 늘 용기를 복 돋아 줬다. 그러기를 몇 해 계속했다.

이후 3년째부터 난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커뮤니티를 위해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을까 하며 생각한 것이 웹사이트를 통한 봉사였다. 컴맹에 가까운 나였지만 내가 이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별 문제는 되지 못했다. 내가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는 점은 나는 그들을 위한 봉사에 있어서 내 몸을 사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들은 가능하면 그날에 끝내기 위해 점수와 사진 올리는 일로 밤새우는 일도 많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그들과 나 사이에 아니 한국인과 미국 현지인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이런 점을 높이 사서 미국에서의 삶 속에서 처음으로 Little League “Fan of the Year“ 상을 받았으며 받는 순간 난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당신들을 참으로 사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난 당신들과 일하고 싶다고. 그 일 후로 나는 참으로 바빠졌다. 매스컴에서 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다른 대학에서 도와 달라는 부탁도 들어왔다.

리들 리그 경기장에서 만났던 코치가 피망 대학의 코치로 있다면서 내게 Piedmont College에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집에서 30분 내의 거리였다. 그곳에서도 참으로 열심히 했다. 배구 농구 축구 야구 등 모든 게임에 열심히 했으며. 내가 밝히고 싶은 점은 난 스포츠가 좋은 것이 아니라 선수들에 용기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내게도 작은 룰이 있었다. 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건 지던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으며 오로지 온 힘 다해 싸우는 선수들에게 용기가 된다면 만족했다. 물론 우리 팀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한 때는 차로 8시간이나 걸리는 사바나 근처 대학에 갔었지만, 눈이 내린 관계로 경기가 취소돼서 되돌아왔던 경험 그 다음 또 한 번 갔었지만, 또 아쉽게도 한 경기가 일기로 취소됐다는 소식에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다.

어느 추운 날 난 애틀랜타 오가데롭 대학에 경기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차 라디에이터 호스에 누수로 밤새 열을 식히기를 여러 번 하며 아침이 돼서야 도착했던 일 그러나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 작은 일이지만 이 일을 통해서 이들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부터는 매해 Piedmont College로부터 뱅큇을 통해서 넘버원 팬이라는 칭호와 함께 상패를 받았으며 이 대학 학장님으로부터는 본인의복에 달았던 학교 배지를 빼서 내게 직접 달아주시고는 내 아들을 이 학교에 보내 달라는 말씀까지 받았다. 때로는 학교 신문을 통해서 나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으며 내가 사정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을 때는 학교 신문을 통해서 나를 애타게 찾는 싣기도 했다.

물론 이곳 텔레비전 WNEG-TV 32에서는 스포츠 뉴스 시간에 넘버원 팬, 슈퍼 팬이라는 칭호와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해가 바뀌면서 이곳 리들리그 야구에 Kyung Lee가 보드멤버에 리스트 되면서 경리와 리들리그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며 현재(~2010)까지 최장수 위원으로 있다.

그러면서 지역신문 THE TOCCOA RECORD와 지역방송 WNEG-630, WNET-1420 WNEG-TV 들에서 내 소개가 계속 되면서 Kyung Lee는 일약 이곳의 유명 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연 이곳 유명인사들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많은 친구를 만들 수 있었으며 꼬마에서 많은 어른에 이르기까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파트에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땐 리들리그 관계자들이 이사해 주었으며 집들이 때에는 100여 명을 3회에 걸쳐 초대했고 미처 초대받지 못해서 아쉽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할 정도이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곳에서는 아주 큰 대회가 있었다. Senior League Southern Regional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난 이때에도 웹사이트를 통해서 그들을 위해 봉사했으며 내 이름이 대회에 당당하게 위원으로 기록되었으며 많은 다른 주 선수들과 임원들에게 단상에 초대되어 소개되었음 과 동시에 나 자신이 한국인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으니 햇수로 13년 됐다.

참고로 Southern Regional 경기는 8개 주 대표팀들이 모여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팀을 결정하는 대회며 아시아권 예선 경기에 비교된다. 그런 일이 있고 나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길거리나 학교에서 나를 보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Kyung Lee, Kyung Lee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할 때 참으로 뿌듯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전조등 켜는 문제로 실수했는데 다름 아닌 늦은 시각에 Anderson S.C.서 전조등을 켜지 않고서 0.1마일 달려 경찰에게 티켓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리틀리그 코칭스태프들 에게 말을 했더니 몇 명의 경찰 친구들이 서로 돕겠다면서 코트에 가자는 것이었다. 참으로 감사하기는 그곳 코트에서 없던 일로 판결을 받은 점보다는 친구들이 진정으로 나를 변호해 주기 위해서 새벽부터 귀한 시간을 냈다는 점이 너무나 감사했다.

이전 덜 좋았던 경험에 비해서 얼마나 대조적인 장면인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지금부터 9년 전에 한 대학을 소개받았는데, 사우스 케롤라이나 명문인 Clemson University였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정 이렇게 셋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여행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던 중 잠시 정차 후 재시동에 문제 있어 누구의 도움이 필요했던 적이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추운 날씨로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십분 쯤후 어느 청년이 베러리 연결로 내 차가 움직였을 때 난 그에게 클렘슨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언젠가는 꼭 그 학교에 방문을 결심하고, 고마운 마음에 그 학교 배구팀을 응원했다. 나의 작은 노력이 그 학교 운동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듯하고 그리하여 그 학교에서는 매년 한 명을 뽑아 상주는 날에 나를 선택해 이해의 넘버원 팬으로 공식 인정하며 풋볼경기 앞서 50라인에서 수만 명 앞에 큰 상을 얻는 영예를 얻었으며

여자 테니스팀의 경우엔 미 전역 NCAA FINAL 4 2004,2005년 기록적인 결과에 내 도움이 컸다면서 큰 상을 또 주었으며 나를 위해서 동영상을 만들어 전국 대학 테니스 관계자들과 심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내가 열심히 도와줬던 프랑스의 유명선수 Julie Coin 이 선수는 US Open 테니스 매치에서 세계 랭킹 1위 선수를 물리쳤던 선수인데 무려 3년 넘게 도왔으며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로는 그 선수의 부모가 Julie를 잊지 말라며 줄리 선수의 고향집을 그려서 내게 선물해 보관 중이다. 졸업 후 프랑스에 가서도 내게 전화와 메일로 주고받은 선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배구팀과의 9년 관계 속에서 매해 큰 상과 선물을 받게 되는 일도 있었고 또한 정규중계방송 (ESPN. CSS-TV, FOX-TV)가운데 Kyung Lee를 소개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며 몇 주 전에는 클렘슨 팀이 3연속으로 NCAA에 진출해 캔타키 렉싱턴에 있는 캔타키 대학에 무려 21시간(가는데 9시간 오는데 12시간 게임 두 시간 남짓) 왕복 운전해서 다녀왔다. 온 종일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아니 비 정상적인 일이었다. 사실 나는 한쪽 눈이 실명된 상태이며 혈압이 상당히 높아 있었기에 참 바보짓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일 또한 나를 필요로 하는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코칭스탭들은 날 팀원으로 보며 없어서는 안 될 팬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른 삶의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은 이러한 작은 봉사를 통해서 내가 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작은 힘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조지아 하원의원, 시장, 학교장, 변호사, 텔레비전, 라디오 아나운서 분들, 신문사 편집장, 그 밖 많은 지역사회 유지 등등 수많은 좋은 분들과 친구나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오늘도 살고 있으며 그들의 따뜻한 돌 봄에 기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난다. 미주 일간 신문 편집장님께서 내게 이런 귀중한 말씀을 하셨다. “당신은 우리나라의 명예 대사입니다.”

전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지만 내게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간대사로서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루하루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말: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올리고, 이 일을 하면서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던 점이 늘 아쉬울 따름이다.



학위:  B.A.  M.A.
현재: ICC(KOREA)INC, Regional Director for ICC in U.S.A.

Early retired Pastor.
Toccoa Little League Board of Directors (1999 ~)
Southern Regional Tournament Committee,
NCAA Tennis No 1 Fan,
Piedmont College Faithful Award,
2003 Clemson University Gate Farr Sprit Award.
Good neighbor Award Nominations

   문화복지신문  장종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