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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입적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11. 19:55


탐욕의 시대… 청빈의 삶 실천한 '영혼의 스승'강원도 산골서 혼자 살며 '영롱한 글'로 대중과 소통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있으면 맑은 사회 구현에 써달라“ '무소유' 삶 남기고… 법정스님 입적
11일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은 종교를 넘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오두막에서 자연을 지키며 청빈한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호소하는 글을 통해 영혼을 정화시킨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며 ‘무소유’ 정신을 실천한 ‘영혼의 스승’으로 자리했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아 대중 법문을 들려줬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나서다=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그는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하며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과 함께 공부했다. 법정 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 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과 자책을 느낀 후 걸망을 짊어지며 본래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간다.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산문집 ‘무소유’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불일암을 찾아드는 사람들의 등쌀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그곳은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오두막에서 전파한 진정한 부와 행복에 이르는 법=건강이 나빠진 법정 스님은 지난해 겨울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은둔자의 삶을 살며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을 실천했던 법정 스님은 주옥 같은 산문으로 맑은 정신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는 2008년 마지막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다”라고 말한 스님은 “늘 모자랄까봐 미리 준비해 쌓아 두는 마음이 곧 결핍”이라고 일깨웠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 터 7000여평을 시주받아 1997년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했다. 그리고 스님은 2003년까지 길상사의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주며 시대의 잘못을 꾸짖고 고단한 대중들을 위로했다.

◆마지막 길까지 놓지 않은 ‘무소유’ 정신=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에서 스님의 평생의 삶이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스님은 ‘무소유’에서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스님은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산문집은 물론 수많은 법문집과 경전 번역서, 여행서 등을 저술한 법정 스님은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기며 탐욕의 시대, 우리에게 마음의 등불을 밝혔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겸손해했다.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생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달라.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스님의 유지에 따라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으며 일체의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다.

스님은 또 입적하기 전날인 10일 밤에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겼다.(문화복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