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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딛고 美강단에 선 정유선조지메이슨大 교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3. 20:33




“장애인 반대는 非장애인…‘정상’아니라고 말하지마라”

‘사랑·희망 전령사’ - 뇌성마비 딛고 美강단에 선 정유선 조지메이슨大 교수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당당히 미국 대학 강단에 선 정유선(40·사진) 조지메이슨대 교수. 인터뷰를 신청하고 대학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사무적 만남을 예상했던 기자는 일요일 오후 자택 방문을 요청한 정 교수의 ‘담백함’에 우선 놀랐다. 아니, 당당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지 않아도 정 교수의 남편과 두 아이를 만나고 싶었는데, 기자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휴일인 1월31일 오후 고즈넉하고 아담한 미 버지니아 페어팩스의 자택에서 남편이 타준 커피 한 잔을 놓고 그녀의 인생을 들을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잘생긴 남편 장석화씨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내내 부인 정 교수 곁에서 필요한 서류를 날라다주었고, 말이 어눌한 부인을 위해 의사소통을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 아들 하빈이와 딸 예빈이까지 나란히 앉아 너무나 단란한 가정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대뜸 ‘행복이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묻자 “그냥 이렇게 사는 게 행복 아닌가요. 나를 반겨주는 가정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재미를 얻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 이게 행복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정 교수에게 찾아온 기적과도 같은 삶이다. 그녀는 3세 무렵 신생아 황달에 의해 뇌성마비 장애인이 됐다. 언어장애와 지체장애가 있어 말을 똑바로 할 수 없으며 걷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녀가 이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게 됐다.

어머니인 김희선씨가 결혼을 반대할 당시만 해도 이 같은 삶을 예상할 순 없었다. 어머니 김씨는 본인도 힘들고 시댁도 힘든 장애인 딸의 결혼생활을 결코 찬성할 수 없었지만, 지금 정 교수는 가정과 사회생활의 꿈을 모두 이룬 ‘복 많은’ 여인이 됐다.‘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는 정 교수의 자서전 제목처럼, 그녀는 평범한 삶 속에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어나간 의지의 한국인이다.

“교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더니 이런 꿈 같은 날이 왔습니다.”

정 교수는 2004년 조지메이슨대에서 의사소통 보조기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재활공학분야에서 일군 한국인 최초의 값진 박사학위 때문에 국내 언론에 크게 소개됐고, 나름대로 유명인이 됐다. 그로부터 6년 가량이 흐른 2010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장애인 누구든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희망의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4월에는 메릴랜드에서 한미장애인협회 초청으로 사례 발표를 하게 됐어요. 사실 발표를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게 많고, 시간을 많이 뺏깁니다. 제 몸이 이래서 힘이 들지만, 한 사람에게라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강의에 나섭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용하는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정 교수가 사용하고 있다면, 그녀의 상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까. 호킹 박사처럼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강의를 하는 것은 힘든 수준이다. 보조기기는 미리 준비한 문장을 입력해서 목소리 대신 컴퓨터언어로 강의를 하는 것이며, 질문을 받을 땐 보조기기 자판에 글자를 입력하면 음성으로 바뀐다. 정 교수는 보조기기의 성능을 직접 시연하며 보여주었다. 마치 음성자동응답기 같은 녹화음이 나오는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썩 좋아할 리 있을까.

“그래서 중간중간에 농담도 집어넣고, 강의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반응도 미리 예상해서 녹음 음성을 집어넣어야 하고요. 남들보다 훨씬 노력이 필요한 거죠.”

그렇지만 이 보조기기는 그녀에게 교수생활을 가능케 해준 도구다.

“저는 언어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무조건 보조기기를 사용하라고 권장합니다. 우선 말을 못해서 오는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저도 진작 이것을 알아 대학때부터 사용했더라면 훨씬 빨리 석사,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을 거예요. 이것을 사용하면 언어장애인들이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을 겁니다.”

지난 고통이 떠올랐을까. 보조기기에 대한 자랑을 한참이나 계속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낙방한 뒤 유학길에 오른 1989년. 미국 대학의 ESL 수업때 언어장애 때문에 도저히 영어발음을 할 수 없어 좌절하고 ‘죽고 싶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죽으면 이런 고통, 안 받아도 될 텐데…’라고 수없이 썼던 그녀. 그래서 “좀 더 일찍 보조기기를 알았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정 교수가 미국에 유학오지 않고 한국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감스럽지만 그녀도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저에게 사연을 보내시는 분들이 있어요. 언어장애가 있는 한 분이 방송작가를 하고 싶어하는데, 관련 아카데미(학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보조기기를 활용하라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그걸 사용하면 더 이상하게 봐서 힘들다고 하더군요. 미국은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려는 분위기인데 반해, 한국은 여전히 참고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아요.”

이쯤에서 가족들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다. 친구 오빠로 대학시절 연애를 통해 만난 남편 장씨는 이민 2세로 연방정부로부터 환경관련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첫눈에 정 교수의 ‘심성’을 알아보고 대시했다는 장씨는 벌써 결혼에 ‘성공’한 지 15년째다. 아들과 딸을 포함한 가족은 정 교수에게 ‘또 하나의 기적’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은 지체장애로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임신에 어려움이 있다고 알려져 걱정을 많이 했지만, 태교음악, 라마즈 분만수업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큰아들 하빈이를 낳았고, 둘째 예빈이까지 낳아 건강하게 키우고 있다.

“한번은 하빈이가 ‘엄마 입이 왜 일그러지는지 친구들이 물어보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하기에 학교 일일교사 자원봉사를 결심했어요.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 헬렌 켈러, 호킹 박사 등의 삶을 얘기해줬지요.‘뇌성마비도 전염이 되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뇌성마비는 전염이 안돼. 하빈이가 그 증거야’라고 말해주고, 꾸준히 치료 받으면 좋아진다고 설명했지요. 친구들이 너무너무 좋아하게 됐다며 하빈이가 자랑스러워했어요.”

정 교수는 장애인 화장실을 쓰지 않고, 장애인 주차장도 아예 장애인주차증이 없어서 가지 않는다.

“꼭 얌체 같더라고요. 내 다리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냥 걸을 수 있는 상태인데요….”

‘악바리 정유선’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 교수는 장애인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상인? 아니, ‘비장애인’이라고 했다. 세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있을 뿐, 장애인으로 특별한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희망전령사로서의 인생 계획을 물어봤다.

“너무 피곤해서 때론 1년쯤 쉬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옛날에는 나 혼자만의 인생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 얘기가 많이 알려지면서 포기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줄거잖아요. 힘들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삽니다. 한국에 가서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소망도 있어요. 사실 이화여대와 대구대 등에서 교환교수 등을 제의해왔지만, 아직 애들이 어리기 때문에 엄두를 못내요. 애들이 크는 대로 한국에서 강의하고 싶어요”  (문화복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