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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박영석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14. 13:45



해발 6500m의 웨스턴쿰 빙하에서 8848m 높이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수직고 약 2400m 높이로 치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히말라야 거봉의 수많은 등반로 중에서도 가장 험난하다는 평을 듣는 벽이다. 바위와 얼음, 눈이 뒤섞인 남서벽에 길을 낸 것은 75년 영국 보닝턴 원정대와 82년 구소련 원정대 2개 팀에 불과하다. 특히 보닝턴 팀은 18명의 세계적인 산악인을 비롯해 108명이 참가한 대규모 원정대였고, 구소련 팀은 27명의 막강한 대원으로 구성된 원정대였던 데 비해 박영석 팀은 대원 5명과 셰르파 7명의 소규모 원정대였다는 점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은 더욱 값지다 할 수 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박영석에게 한 맺힌 벽이었다. 91년 첫 도전 때는 해발 7000m대 벽에서 100m나 추락했다. 이틀간이나 의식을 잃었을 만큼 큰 사고였다. 그런데도 그는 헬기로 긴급 구조돼 후송된 카트만두의 병원에 누워 벽에 걸린 에베레스트 사진을 보며 다짐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기다려라.’ 93년 다시 도전했다. 동국대 단일 대학 산악부 원정이었다. 그는 그 등반에서 막판에 장비가 모자라 남서벽 등반을 포기해야 했으나, 남동릉 루트로 변경해 국내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그 등반에서 후배 대원 2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박영석의 에베레스트에 대한 집착은 그로써 끝나지 않았다. 1996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긴 북동릉에 도전했다. 불운은 계속 되었다. 이 도전 역시 눈사태로 사다(우두머리 셰르파)가 사망하고 박영석은 갈비뼈 두 대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잠잠하던 에베레스트 열기가 다시 살아난 게 산악 그랜드슬램에 성공한 이듬해인 2006년이었고, 그 해 횡단등반에 성공하자 남서벽으로 다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번엔 이전에 두 차례 등반했던 보닝턴 루트가 아닌 신 루트였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한국인의 길을 내고자 하는 꿈이었다. 그러나 남서벽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2007년 첫 번째 도전 때는 제4캠프(7900m)에서 머물던 대원 2명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에 텐트가 무너지면서 1300m 아래 설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고를 당한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5년 넘게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 히말라야 등반과 극지탐험을 함께 해온, 혈육 같은 후배들이었다. 그는 한동안 후배들에 대한 죄책감에 눈만 뜨면 술독에 빠져 지냈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산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두 후배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순 없었다.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2008년 가을, 각오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대원들과 함께 남서벽 재도전에 나섰다. 잘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등반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평년과 달리 빠른 시기에 겨울이 찾아오면서 에베레스트 정상은 시속 100km가 넘는 강풍을 동반하는 제트기류에 휩싸였으며, 다시 인간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 신들의 세계로 변해 버렸다.


올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은 91년 이후 다섯 번째 도전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등반은 제4캠프(7800m)를 구축하고 제2캠프(6500m)으로 내려서던 박영석이 종아리 근육이 터져나가는 부상을 당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선 다음 여러 날 동안 깁스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치명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영석은 5월 20일 새벽 0시49분 해발 8400m 높이의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박대장은 출발을 앞두고 대원들 앞에서 다짐했다. “오늘 우리가 만든 길을 따라 세계 최고봉을 오른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다. 염려 마라. 다리를 끌고서라도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부담을 줄 것 같으면 망설임 없이 되돌아서겠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릉은 험했다. 서릉은 79년 유고 팀이 처음 등반한 이후 82년 구소련팀 한 팀만 재등에 성공한 바위 능선이었다. 그렇게 험악한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해발 8600m 지점에서 100m 높이로 치솟은 첫 번째 암벽을 넘어선 시각이 등정 예상 시각인 정오경. 산소통 안의 산소가 떨어져가자 후배 두 명이 힘들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티베트 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강풍이 불어오고 날씨가 나빠진다는 조짐이었다. “저 구름이 덮치면 너희 둘은 죽는다. 살려면 바짝 따라붙어라.”



박영석은 정상을 향하는 사이 환각에 빠졌다. 2007년 남서벽에서 목숨을 잃은 오희준, 이현조와 1993년 사고를 당한 남원우, 안진섭 네 후배와 함께 정상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형, 힘내요. 형, 다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후배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현조가 손을 한 번 잡아주고, 희준이 씩 웃으며 힘내라 격려해주었다. 수직벽이 반복되는 서릉은 정상 바로 밑에서 막을 내렸다. 정상에 서는 순간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고맙다”는 말만 나왔다. 네 명이 목숨을 잃었고, 한 번 도전할 때마다 엄청난 경비가 들어가는 남서벽 원정을 선배들도 너무도 고마웠다. 정상에 선 그는 이들의 사진을 눈 속 깊이 묻었다. 박영석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드디어 해냈다. 희준아, 현조야. 고맙다. 미안하다.”


박영석은 1963년 11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교 시절까지 안 해본 스포츠가 없을 만큼 다양하게 운동을 했다. 사격선수 생활을 하던 오산고 2학년 때인 1980년 마나슬루 원정에 성공해 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동국산악회 원정대를 보고 ‘진짜 남자라면 저런 산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그는 재수를 거쳐 83년 동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다.



산악부에 들어간 그는 살 떨릴 만큼 아슬아슬한 바윗길 오름짓을 거듭하고, 허리가 휘청거릴 만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릉을 오르내려야 하는 동하계 장기등반도 견뎌냈다. 이렇게 산꾼의 길에 들어선 그는 자연스레 ‘신들의 영역’이라는 히말라야 하얀 산에 발을 들여놓는다. 박영석이 촉망 받는 산악인으로 떠오른 것은 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직후였다. 이후 그는 8년이란 세월 동안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주력해 2001년 ‘산 중의 산’ ‘히말라야의 공동묘지’라는 악명을 지닌 K2(8611m) 정상에서 8,000m 14좌 완등의 대업을 마무리지었다.


K2 정상에 섰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그 동안 함께 등반하다 목숨을 잃은 4명의 선후배와 2명의 셰르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산길에 만난 박영도 대원이 함께 마지막 캠프(8000m)로 내려서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추락하고 만 것. 이렇게 14좌 등정 레이스가 비극적으로 끝났기에 박영석은 이후 더 이상 모험을 펼치지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K2 원정 직전 발표한 대로 그랜드슬램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두 아들 성우(19), 성민(15)에게 ‘다른 건 몰라도 산에 관한 한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아버지가 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2001년 14개 거봉을 완등했을 때 그랬듯이 2005년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후에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제의를 여기저기서 받았다. 모교인 동국대에서는 교수 자리를 제안했고, 수많은 기업체에서 그를 통해 산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남의 옷 입고 불편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대학에는 훌륭한 후배들이 많은데 제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요. 후배들이 다 저를 믿고 다니는데 제가 딴짓 하면 따라오겠습니까?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은 다른 데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




박영석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발표했다. 14개 거봉에 코리안 루트를 내는 것이다. 박영석은 2007년 초 해류에 휩쓸려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실패했던 베링해협에 재도전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북극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 베링해협은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극을 두고 하는 말일 거예요. 춥고 배고프고…. 바닷물에 한 번 빠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금세 미라처럼 굳어요. 아래 윗니가 딱딱딱딱 부딪치면서 말이에요. 북극점 두 번째 도전 때 가장 고민했던 것 이 뭔지 아세요? 실패가 아니었어요. 실패하면 다시 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극점을 밟는 순간에도 다신 안 와도 된다는 안도감에 기뻤던 거예요.”




  서울시 홍보대사이기도 한 박영석은 에베레스트를 제외한 13개 거봉 신 루트 개척등반에 대해 구상에 열중하면서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그에 앞서 귀국한 지 20일만인 6월 21일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성금을 모으는 희망찾기 등반대회를 치렀고 7월 6일부터 20일 동안 160여명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희망원정대를 이끌고 40여 일의 국토 횡단에 나선다. 올해로 6번째 행사다.



“이번에 등반 마치고 카트만두로 돌아왔을 때 네팔 정부는 시 외곽에 땅을 무상 지원하기로 약속했어요. 거기다 병원을 지을 거예요. 네팔은 의료 수준이 형편없거든요. 하나하나 늘려 나갈 거예요. 그게 또한 제가 신세지고 저와 함께 산을 다니다 목숨을 잃은 셰르파들을 위한 일일 테니까요. 먼저 간 후배들 생각하면 쉴 수가 없어요. 그들 몫까지 제가 해내야 하니까요.” 박영석은 “고산 다니다 보니 머리가 나빠져 이젠 손에 들고 있는 건 다 잊어 먹는 수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산에 가야 산악인이고 탐험가 아니겠냐?”고 강조했다. “히말라야 14개 거봉 신 루트를 제가 다 오르겠다는 건 아니에요. 저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체력이 떨어져가고 있으니까요. 후배들에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일단 제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이어나가지 않겠어요? 걸을 수 있고, 숨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할 거예요. 등반과 탐험이 제 삶 자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