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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웃들의 수호천사인 동두천 동원병원 이사장 전덕기시인.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6. 13:15


우리네 인생살이는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동원병원의 이사장인 전덕기 시인과의 인연은 이전에도 몇 번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있었지만, 이제는 꼭 만나야 할 필연의 시점이 되었는지, 지인의 열렬한 추천으로 전덕기 시인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행사장에서 만나 전덕기 시인이 내개 준 준 명함 뒷면에는 전시인의 지나온 과거 행적과 현재의 활동상황이 적나하게 들어나 있었다.몇 번의 전화 끝에 전시인과 통화가 이루어짐에 인터뷰 날짜를 잡고 그녀가 정해준 장소인 ‘춘우 문화관’을 찾았다.

동소문동에 위치한 3층짜리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춘우문화관’은 전시인이 거주하는 주택 겸 작은 공간의 박물관으로 지역주민들의 정서와 문화생활에 이바지하고자 전시인의 주택을 몇 년여에 걸쳐 리모델링해 만든 3층건물로 1층은 전덕기시인의 주거용이며 2층은 양서들과 그동안 발간했던 자신의 대표 시집들과 수필집, 칼람집을 비롯해 문화, 예술에 관련된 책들과 태극기에 관련된 자료들로 전시돼 있었다. 3층은 전덕기시인이 문화,예술인, 그 외 지역주민들을 위해 개방하는 쎄미나룸으로 전시인 70여 평생을 살아오면서 130여 개국의 크고 작은 공적인 문화행사에 초청을 받아 각 나라를 방문했을 때마다 수집해온 각 나라의 촛대들이 여행의 추억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업적과 공적에 관한 객관적인 평가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평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예외는 있는 법. 전덕기시인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현역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들과 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동분서주하며, 뛰어 다니는 정열의 화신이다.

인터뷰를 하노라니, 70여 평생 걸어온 길이 결코 탄탄대로만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왔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쓰임을 받는 도구로 평생을 살수있게 해달라는 젊은 날의 간절한 기도를 주님이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졌으며, 그녀가 목표하고 이룩한 그 모든 것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움이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전덕기시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온 여인이라 느껴졌다.

어린시절 친구 따라 가본 교회당의 찬송가 소리에 매료되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그녀. 젊은시절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문인이 되어, 명시를 남기고, 수필가가 되어 감동적인 글로서 많은 사람들 마음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어떻게 사는 삶이 가장 가치있고 ,보람된 삶일까...?!’ 라는 대명제 속에서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중 그녀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회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의해 다시금 신학대학에 재입학.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다, 막상 사회복지학을 공부해보니 사회사업이란, 성경의 가르치심대로 무조건적인 자기희생과 헌신이 없으면 안되는 학문으로 그녀는 사회사업을 통해 주님의 빛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녀는 열심히 기도했다. 주님의 빛과 소금을 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그리고, 용기도 함께 주실 것‘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졸업 후 그녀는 전주시 사회과 후생서기보로 취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녀가 직장생활을 할 때는 5.16구데타 직후였기에, 그녀는 혼란한 시기를 맞은 정부를 위해 보육원과 양로원, 갱생원을 돕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을 서야만 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윤락여성들을 선도하고 구제하는 일에 역점을 두어 개개인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어, 윤락여성들을 부녀직업보도소로 데려와 기술교육을 시켜 그들이 다시는 어둠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만들었다. 1973년까지 그녀는 공무원의 신분으로 부녀직업보도소 및 부녀 상담소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1977년이 되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더 큰일을 맡기셨다 그동안 해 왔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인 국립정신 병원에서 정신질환자와 보호자상담을 돕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 정신이 단 한 곳 뿐 이였기에 전국에서 밀려드는 환자들로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입원실이 부족해 되돌아가야하는 환자들에게는 대기표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2~3년이 지나도 병원의 혜택을 보는 환자들은 일부 몇몇 환자에게만 국한 될 뿐. 대 다수의 환자들은 정부의 의료혜택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정신질환자 치료에는 신경안정제를 투입할 뿐 밀려드는 환자를 제 때 치료하기에는 언제나 한계를 느꼈으며 정신질환자들은 약물치료보다는 인성재교정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신질환자을 돕기 위해서는 보호자가 환자의 정신과 육체, 모두의 재활치료에 힘써야 함을 느껴, 그녀는 국립정신병원에서 실시하는 정신신경과 의사들의 인턴, 레지던트과정을 청강하며 정신질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몇 년간을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보내던 그녀는 공무원의 신분이였지만, 그는 정신질환자들 치료에 이바지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보호협회’를 만들도록 옆에서 후원하여, 그 결과 80년 2월27일에 창립총회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보호협회를 만들었어도 정부지원과 입원실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곳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던 정신질환자가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입원 동기나 장기입원과정이 석연치 않아 개별 인터뷰를 생각하고 있던 환자였기에 슬픔은 더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 그녀는 다시금 주님께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다. ‘정신질환자들이 보다 나은 시설에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을... ’기도 중에 그녀는 “ 그렇다면 그 일을 네가 직접하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응답과 함께 섬광을 느꼈다. 그녀는 정신장애인과 알코올, 약물중독자, 성격장애인등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들을 치료하는 사업에 매진 하기위해 공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녀가 대학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목사님들과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으로 ‘가화신우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녀는 환자들 대부분이 정신질환자들이였기에 병원부지 가격도 싸며 서울에서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요하는 외곽지역인 동두천에다가 동원정신병원을 세웠다. 그녀는 정신병은 유전이기보다는 가족과 주위사람들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억압, 상처, 외면에 의해 유발된 질환이라고 느껴 환자는 물론 그들을 돌보는 보호자의 정신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약물치료와 함께 환자들에 대한 인성재교정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 상식과 대치방법을 주안점을 두어 치료에 임했다. 이후 그녀는 여세를 몰아 동원노인병원까지 개원하였으며, 더 나아가 경기도 도립 동두천노인전문병원까지 개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병원을 운영해오며 우여곡절도 많아, 1998년 8월6일에는 홍수로 인해 동두천 시내가 물에 잠겨 그녀가 운영하는 동원정신병원도 물에 잠기게 되었다. 정신병원이였기에 동두천시내와는 좀 떨어진 자연 경관이 좋은 외곽에 위치했던 병원도 불어나는 계곡물로 인해 일부가 잠기게 되었으며, 그녀는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계곡물을 건너던 중 거센 급류에 휘말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선행을 지켜보신 하나님의 돌보심인지 극한상황에서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하얀 동아줄이 보임에 그 줄을 잡고서 급류에 떠 밀려가는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그 줄을 ‘여호와 이레의 칡넝쿨’이라 여기며,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다시금 무릎 꿇고 감사하며 어려운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다가 오라는 하나님의 계시라 여기며 주어진 사명에 책임을 다하고자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1999년에 이르러서는 문서선교에도 관심을 가져, 출판사를 창업. 재소자들에게 편지와 책을 보내는 ‘해바라기 선교회’를 발족,140여명의 회원이 힘을 합쳐 ‘사랑의 우체동봉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교도소에 수감 돼 있는 재소자들에게 편지와 함께 목사님들의 간증을 담은 ‘내가 전하는 십자가’란 발간해 교도소에 책을 보내주었다. 교도소에서 이 책을 받아 본 한 수감자가 감사의 답장과 함께, 공용이 아닌, 자신 혼자만 간직해서 볼 수 있는 책들이 보급되기를 소망하는 편지를 받음에 ‘해바라기 선교회’는 교도소에 양서 보내기운동을 펼쳐, 창립 5주년에는 교도소는 물론 면사무소와 농어촌 작은 교회에도 양서를 보내주었다. 그녀의 봉사 활동을 현재까지 끝없이 이어져 월곡동 소재 사회복지법인의 ‘생명의 전화.’ 이사로 활동 중이며.,‘한국기독교 문화예술원’의 부총재.‘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 YWCA와 세계선린회, 우원기념사업회 등 많은 단체에서 현역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70여 평생을 살아오며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주님을 향한 가정예배 시간을 갖고 기도로 시작과 끝을 맺는 참 신앙인의 삶을 영위해오고 있는 전덕기 이사장.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신앙의 힘 외에 나를 일으켜준 것은 바로 시(詩)였다.’고 말하는 그녀. ‘시상이 떠오를 때 마다 마음의 생각들을 모아 시를 쓰다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이내 평안해지곤 한다’ 는 그녀는 1971년 ‘이슬이 내리지 않는 초원’이란 제목으로 첫 시집을 출간 한 후 기독교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현대시인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모두 8권의 시집을 냈다. 대학 학창시절의 꿈을 이룬 그녀. 이 나이에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으로 시를 쓸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일 수 있음에 그저 행복하다고 말하는 전덕기시인. 남은여생은 젊은 시절 그토록 글을 쓰고 싶어도 직장생활과 사회활동으로 인해 글을 쓰고 싶어도 시간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이제는 젊은 시절 그리도 원했던 문인으로 돌아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쓰고 싶었던 글쓰기에 전념하려 노력한다.‘며, 주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믿기에, 모든 것을 오롯이 주님께 맡기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 보이는 시인 겸 동원병원이사장인 전덕기. 그녀의 앞날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여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며, 이 사회에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마음껏 하시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문화복지신문 강명희기자


약력: 전북진안 출생
덕성여자대학 국문과, 서울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중앙 신학대학교(현: 강남대학) 사회사업학과 졸업.
University of South (N.S.W) 졸업
의료법인 : 가화의료재단 동원병원 이사장.
경기도 도립 동두천 노인전문병원 이사장.
춘우문화관 관장.
기독교 문인협회, 여성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 문인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 기독교 시인협회 이사, 한국 기독청소년 춘우 문학상 운영 위원회 대표.
            
(수상 및 표창)
보건사회부장관상, 서울시장표창, 한국시 문학대상.노산 문학상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