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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길을 가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4. 3. 09:57


◈어머니의 길을 가다◈

내 삶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 건 딸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난 뒤였다.

저녁 식사준비를 하다가 두부가 필요해서 딸에게‘두부 한 모 사다 줄래?’
했다
곧장 되돌아오는 말 “오빠 시켜”
‘오빠는 남자잖아 공주가 엄마 심부름 좀 해주라 응?’
“싫어 남자는 심부름도 못해?”
딸이 자기 방문을 휙 닫고 들어가 버린다.

다른 때 같았으면“알았어 엄마” 하고 냉큼 심부름을 다녀왔을 딸이
오늘은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았나 보다.
딸의 성격을 잘 알기에 하는 수 없이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지갑을 챙겨 나간다.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할 줄 알았던 딸아이한테 퇴짜를 맞고 보니
기분도 심란하고 남자라는 말에 왜 그렇게 불끈 화를 냈는지 모를 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게를 향해 걷는다.

담벼락을 지나 집 모퉁이로 들어서는데 한 여자 아이가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탈래탈래 걸어간다,
그때였다. 어릴 적 주전자를 손에 들고 심부름 가던 내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라 눈썹 끝에 머물자 화를 냈던 여식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와 두 동생을 둔 4남매 중의 맏이였던 나는 집안의 자질 구래 한
잔심부름을 혼자 도맡아 놓고 했다.
간간이 심부름하는 것이 귀찮거나 힘에 겨워 오빠를 시켰으면 하는 마음에
말씀을 드리면 어머니는 “오빠는 남자잖니” 라는 말로 내 말을 가로막으셨다.

양반 가문 내세우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큰 덕목이라
가르치시며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라셨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내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양반 따지고 남자와 여자 구별을 해’라며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 내 몸과 마음은 어머니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닮지 않아야 했던 아니 답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나 또한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 내 아들과 딸에게 행하고 있었으니 그동안 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미안했다. 혹여 남자라는 이유로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딸에게 생길까 봐
내심 걱정이 됐다. 엄마인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가던 걸음을 되돌려 가게로 다시 들어가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한 통을 샀다.
그동안 아들이라는 이유로 오빠를 두고 딸한테만 심부름을 시켰던 내가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엄마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남, 여를 구별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네 외할머니를
닮아가고 있었구나 라는 말과 함께…….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나듯 딸아이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엄마와 오빠에 대한 서운함도 소리 없이 녹아내릴 수 있을까?


<시인, 수필가  김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