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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5. 22:34


초록(요약)
종목 : 보물 제299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수량 : 1동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화엄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299호 : 1963.1.21 지정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로 화엄사 경내에서 각황전(覺皇殿) 다음 가는 큰 건물로 각황전 앞에 보면 대웅전이 있다. 흔히들 그저 규모의 미학에 빠져 사찰에서 가장 큰 건물이 대웅전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은 처음에 각황전이 금당(金堂)으로 안다.   그 전면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는데, 이 대웅전은 이 대석단 위에 남향으로 서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기둥 사이의 간격은 모두 동일하게 하고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주열(柱列)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전면 주간(柱間)에 각각 세 짝으로 된 문짝을 달았으며 그 위로 교창(交窓)을 냈다. 공포( 包 : 기둥 위에서 처마를 받치도록 주두.첨차.소로 등을 짜맞춘 것)는 내외3출목(內外三出目)의 갖은 포작으로 외부에서는 소의 혓바닥 모양인 쇠서[牛舌 :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얹어 첨차와 직교하여 짜여지며 끝을 소의 혀 모양을 오려낸 부재. 춧가지 ]를 윗부분에 조각한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되고,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친 공포의 살미첨차(山彌 遮)가 한몸으로 합쳐져서 장식판처럼 변형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불단 후면에 3개, 불단 전면 좌·우측에 2개의 높은 기둥을 배치하여 대들보를 받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주위의 외둘레 사이를 중앙부분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3구의 금동불상을 안치 하였는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크고 제작 기법도 우수한 불상이다. 불단 위에는 각각 J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을 3개 달았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하늘에 걸려 있는 덮개라는 뜻으로 대개 법당 안의 탁자 위를 덮도록 만든 달집, 또 불상 머리 위를 가리는(日傘) 천개가 섬세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정밀하게 조립한 점이 색다르다.
대웅전 뒤로는 십우도 10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하나하나 해석해나가면 소가 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인간에 비유를 하면 인간이 깨우쳐 가는 길이라고 한다.
사적기(寺蹟記)에 의하면 화엄사 법당으로 신라시대에 지어졌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존하는 화엄사의 당우(堂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인조 14년(1636년)에 벽암대사(碧巖大師) 각성(覺性)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규모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서는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을 수 있다.
대웅전의 현판은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李珖·1589∼1645)이 썼다.  편액에는 ‘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崇禎九年 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라는 관지가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로  결구와 필획 모두 바르고 전아(典雅)한 품격을 지닌 해서이다. 의창군은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로 호를 기천(杞泉)이라 했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 처족 허균(許筠)이 모반죄로 주살되자 그에 연루돼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의창군은 글씨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부친인 선조가 즐겨 썼다고 하는 석봉 한호(石峰 韓濩)체의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봄이면 대웅전 옆에 있는 홍매화가 붉게 꽃 봉우리를 살며시 열며 예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화엄사의 아름다움은 홍매화라고 한다. 홍매화는 한국의 전통 매화로 꽃이 붉고 꽃 자체도 무척 고운데- , 그중에서도 화엄사의  홍매화는 매우 예쁘고 너무 너무나 아름다워 그만 넋을 잃어버리게 된다- -

문화부 이순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