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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혈육 찾아 내한한 평양예술대학 출신 길림성가무단 1급 안무가“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2. 10:35


진향란!!!
어머니의 혈육 찾아 내한한 평양예술대학 출신 길림성가무단 1급 안무가

환상적인“최승희의 장고춤은 언제나 무대가 좁아 보이며 아름답게 보입니다.“
제주도 출신 한국인을 어머니로 둔 중국 길림성가무단의 1급 안무가 진향란씨가 혈육을 찾아 고국에 두 번째로 또 내한했었습니다. 최승희와 최승희의 딸 안성희로부터 무용을 배운 진향란씨를 통해 북한의 한국 무용과 중국 교포사회에서의 조선무용이 어떤 변화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본지기자는 한눈에 알수가 있었습니다.
진향란씨를 사단법인 문화예술진흥협회를 통하여 만날수가 있었기에 취재한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진향란씨는 앳된 소녀처럼 수줍어 하며 이렇게 말한다.
“북한 국적을 가진 어머니 대신 제가 혈육을 찾아 왔습니다“ 라며 어딘가 모르게 우리 문화와 익숙치 않은 언어표현으로 여성스런 면을 보여준다.

  진향란씨는 우리문화예술이 '더 잘 보존되어 있다'고 말하기에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정작 우리는 잊고 있었던 전통이 우리교포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어 놀랄 때가 간혹 있다고 했다..
  진향란(陳香蘭, 중국 발음으로는 '천시앙란'이 된다)는 중국에서 한국의 춤사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며. 현재 중국길림성가무극원 종합예술대학교 교장으로 전문직에서 교장 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예술창작교육에서도 총지휘를 하고 있다.  분단 이후 북한의 춤사위가 많이 변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국에서의 조선족 춤도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지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근대 한국 무용의 거목이었던 최승희 에게서 뻗어 나온 한국춤의 한 자락이 중국 교포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하기 또한 어려운 일이다.
  길림성가무단의 1급 안무가인 진향란씨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어머니의 핏줄을 찾기 위함이다. 북경 아시안게임 축전에서 자신이 안무한 1시간 40분짜리 무용극 '인삼녀(人蔘女)'의 공연을 마치고 3개월의 휴가를 얻어 다녀갔고 2008년9월 중국베이징 올림픽 성공에 일조를 한후 다시한번 고국을 찾은것이다.
  “어머니는 북한 국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중국 국적을 가진 본인이 대신 또다시 왔다고 했다.   문화복지신문에 제 기사가 나긴 했지만 아직 어머니의 친척이나 친지들을 한 분도 만나 뵙지 못했어요. 한 분이라도 찾아야 어머니가 섭섭해 하지 않으실 텐데 걱정입니다“
  제주도 성산면 성산리 토진목이 고향인 어머니 김순덕(67세⦁어릴 적 이름은 '김순열')는 해녀였다고 한다. 17세 때 폭파사고를 당한 배에서 시체를 여럿 건져 신문에 나기도 했다고.
  진향란씨가 찾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의 셋째 오빠가 되는 김천일씨와 제주도에서 이웃에 살던 강인선, 강순덕, 강점례 자매였다. 또 할아버지가 그분이 살아 있다면 50세가량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비록 혈육을 찾아 방문을 하긴 했지만 무용가로서의 호기심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친척⦁친지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한편 국내 무용제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이미 진향란씨는 이화여대 무용학과의 김매자 교수, 단국대의 송수남 교수, 한국무용협회의 강선영회장 등을 만났고 국립국악단의 연주와 창무회의 발표회, 서울무용제 공연들을 관람한 상태였다. 또 대학에서의 특강과 사단법인 문화예술진흥협회와 인연을 갖고 연3년째 문화예술교류 를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과 2008년에  제5회 한민족무용대회에 참가하여 중국 단원15명을 인솔하고 한국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하였으며 책임있는 심사위원으로서 솔선수범을 보여주며 동료 위원으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았었다.
  진향란씨는 남한의 한국춤이 철학적인 면이 강한 것 같다는 예전과 같은 평을 했다. 안무가의 창작 수준이 높다는 뜻이었다. 또 고유의 춤사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것이 놀랍다고도 했다.
  한편 남한의 한국춤엔 무용 언어가 풍부하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무용인들 사이에서도 창작 한국무용이 작품의 창의적인 면만을 강조하여 테크닉의 발전은 외면해 왔다는 자평이 있어 왔다.
  그리고 '작품의 밀도가 낮다'는 표현도 했다. 동작이나 작품 전개 속도가 늦어 흥미가 줄어든다는 뜻인 듯했다.
  “한국의 사회발전 속도의 무용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회는 급속도로 변하고 움직여지고 있는데 무용은 사회 발전 속도와 전혀 무관하게 창작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전 중국의 무용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무가는 지금 현재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미적 감각과 감상 기호를 가졌는지 알고 창작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관중의 심리를 많이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진향란씨가 무용을 시작한 것은 63년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한 후부터이다.
  “당시 평양무용대학 입학시험은 2차로 나눠 실시됐어요. 예비시험에선 신체조건을 보고 유연성과 리듬감을 테스트했습니다. 다리의 모양, 다리 길이, 팔 길이, 어깨, 얼굴 등을 자세히 살펴본 후 적격자를 골랐습니다. 정식 시험에선 예비시험에서와 비슷한 신체검사를 다시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리듬감 검사를 했죠. 전 예비시험이 끝난 후에도 도착하여 막바로 정식시험을 봤는데 다행이 붙었어요“

볼쇼이 출신인 안성희는 창작에 서양의 것을 많이 가미

  최승희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진향란씨가 본 평양예술학교의 시험이 최승희의 교습법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문하생이 들어오면 처음부터 무용을 가르치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우선 북 하나만 주어 리듬을 익히게 한 후, 시선을 고정시키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 남방춤을 3년 정도 추게 하고, 그 과정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무용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평양예술대학엔 최승희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진향란씨는 주로 최승희의 딸인 안성희에게서 무용을 배웠다. 안성희는 모스코바의 볼쇼이극장 부속 무용학교에서 4년간 유학생활을 하여 북한 무용에 서양적 요소를 많이 가미한 사람이다. 특히 접시춤을 많이 응용했다. 진향란씨가 본지 촬영을 위해 선보인 무녀춤도 옛 무당춤에 접시춤을 접목시킨 안성희의 무녀춤과 거의 흡사한 것이었다.
   최승희는 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된 이후 권력의 핵심에서 쫓겨나 있었다. 진향란씨가 수업을 받던 무렵 안성희는 무용극장 총장을 하며 일산에서 활동을 했지만 최승희는 무용가 동맹위원회 사업에나 가끔 참여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용 경연대회나 학년말 시험 때 심사위원으로 나오시긴 했으나 지위나 권력은 없으셨어요“
  진향란씨가 최승희의 춤을 직접 본 것은 64년 한 콩쿠르에서였다고.
  “무용인들을 위해서 '장고춤'을 선보인 무대였어요. 제가 본 최승희 선생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였는데 아마 그 후엔 무대에 서신 일이 없을 겁니다. 독춤이었지만 워낙 폭이 넓어서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이었어요. 그 후에도 북한에서나 중국에서 많은 장고춤을 보았지만 그만큼 화려하고 장대한 장고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최승희와 안성희는 모녀간이지만 무용스타일에는 차이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 선생님은 우선 위대한 무용가였고 조선무용을 외국에 알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또 이론적으로 조선무용을 정리한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조선무용 기본'을 비롯, 조선무용에 관한 이론서는 역사적으로 몹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창작에 있어서는 안성희의 의도가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규모 무용경연대회에서 창작무용으로 2차례나 입상

  진향란씨는 67년 중국으로 돌아갔고, 70년대부터 이들 모녀는 북한의 무용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분들을 만나면 두 분의 행방을 물어보곤 했지만 말을 안해 주더군요. 문인들이 주도하여 다수의 예술가들이 남하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발각되어 붙들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67년 장춤으로 돌아온 진향란씨는 길림성 가무단의 무용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72년부터는 창작활동도 겸했는데 지금까지 40여 편을 안무했다고 한다.
  중국에는 중국고전무용, 창작무용, 민간무용, 소수민족무용이 있다고 한다. 민간무용은 우리말로 하자면 민속무용인데 한족의 춤을 일컫는 것이라고. 소수민족 무용에는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무용이 모두 포함되었는데 조선족, 몽고족, 위구르족, 장족, 태족 등의 무용이 발달된 편이라고 한다.
  길림성가무단은 한족, 몽고족, 조선족, 만족의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270명 중 조선족은 30명이다. 안무가는 총 5명인데 한족이 3명, 조선족이 2명이라고.
  “중국의 창작무용은 중국 고전무용을 기초로 하여 다른 춤들을 가미하여 만들어집니다. 저의 경우엔 조선춤을 기초로 하여 다른 춤들을 흡수하는 편입니다“
  진향란씨는 남녀군무인 '풍년 든 기쁨'으로 관심을 모았고 79년 북경 중앙가무단에서 열린 중국인민공화국 국경절 30주년 기념대회에서 남녀군무 '보석 처녀'를 공연, 2등상을 수상하여 비중 있는 안무가 대열에 들어섰다. 이에 80년에는 중국 제 1차 무용경기대회에서 3인무인 '명절의 금바라춤'을 무대에 올려 또 2등상을 받았다.
  이 모든 춤은 조선무용을 기본으로 한 창작무용이었다. 진향란씨의 안무가 적 자질을 확인하게 된 길림성에선 82년 북경무용대학 안무과로 진향란씨를 유학 보냈고, 그 기회에 진향란씨는 자신의 무용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조선무용은 물론이고 중국 고전무용, 한족무용, 발레 등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조선무용 외에 다른 분야의 춤도 창작할 수 있게 됐고, 84년에는 길림성 가무단의 1급 안무가(최고 교수급)에 올랐다.
  진향란씨는  중국인 남편 황치퉁(方起東)씨가 길림성 문물고고학 연구소 소장이어서 한국사학계⦁고고학계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향란씨는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분들에게 꼭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농담 한마디는 덧붙였다.
  “중국에선 남편 덕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국에 오니 오히려 큰 도움이 되더군요“ 라고 말문을 이어갔다.


진향란씨는 (“중국가무극원종합예술대학교 총장 진향란 내방“(문화복지신문 기사내용기사입력 2008-10-04 )
10월3일 개천절을 기해 “중국가무극원종합예술대학교 총장 진향란 이 한국에 오다 란 기사가 문화복지신문에 실려 나갔었다.


사단법인 문화예술진흥협회와 중국가무극원종합예술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지 1주년도 의미가 있지만 제5회 한민족예술제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서울 프리지던트 호텔에서  진향란 총장은 여러가지
양국간의 우호적인 문화발전을 위하여 좀더 큰일을 하자는데
힘을 보태기로 합의하고 가무극원예술대학교 졸업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문화예술 교류 및 교육연수원을 통해 실질적 지도자 수료를 받기를 희망한다며 그듯을 이뤘었다.
진총장은 서울 신설동에 있는 문화예술진흥협회와 문화복지신문사
그리고 문화복지 CWN - TV 의 방송시스템을 둘러보고 문화예술교류는 물론 중국 우리교포들을 위한 고국소식과 한류문화 알리기 앞장서겠다며 중국지부를 수락하고 행정적인 절차에 대하여 의론을 한뒤 지난10월5일 중국으로 돌아갔었다.
2009년에도 진향란씨는 자국의 문화생들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하여 문화예술교류와 핏줄을 찾는 기대에 한껏 부풀러 있을 것이다.
문화복지신문 장종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