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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중수부장 vs 문재인 회고록,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ohmylove 2011. 6. 15. 15:45

이인규(李仁圭, 1958년 1월 22일 ~, 경기도 용인)는 대한민국의 법조인.


이명박 정부에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역임하였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일 때 특수수사를 지휘하는 3차장 검사를 지냈고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지냈다.

2003년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으로서 SK그룹 분식회계 사건을 맡아 최태원 회장을 구속했다. 이어 불법 대선자금 수사팀에 합류해 대기업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을 집중 파헤쳤다.

2009년 제16대 노무현 전대통령을 수사하는 중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하자, 동일한 수사대상이었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하여는 형식적으로 만 수사하고, 죽은 권력에 대하여는 먼지털이 식으로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였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2009년 6월 기수와 서열을 파괴하고 천성관(사법시험 22회)이 검찰총장에 내정된 이후 고급장급 8명이 모두 공식 사임하거나 사의를 표시하였으며 그는 2009년 7월 14일에 퇴임하였다.

 

이인규 약력

  • 2009년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 2009년1월 - 7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
  • 2008년-2009년 대검찰청 기획조정부 부장
  • 2007년-2008년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2006년-2007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 2005년-2006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 2003년-2004년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 지청장
  • 2003년서울지방검찰청 금융조사부 부장검사
  • 2002년서울지방검찰청 형사9부 부장검사
  • 2002년법무부 검찰1과 과장
  • 2001년-2002년 법무부 검찰2과 과장
  • 1999년-2001년 법무부 검찰4과 과장
  • 1997년-1999년 주미국대사관 법무협력관
  • 1996년-1997년 대구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 1994년-1996년 법무부 국제법무심의관실 검사
  • 1994년법무연수원 연구위원
  • 1993년-1994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
  • 1991년-1992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찰연구관 직무대리
  • 1990년-1991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
  • 1988년-1990년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
  • 1987년-1988년 춘천지방검찰청 속초지청 검사
  • 1985년-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 서울대학교법대 졸업
  • 경동고등학교졸업
  • 1958년경기도 용인시에서 출생

이인규와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

이명박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이명박이 지난 1999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검찰 파견직으로 워싱턴 영사관에서 일하며 당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신재민의 소개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신재민은 조선일보를 거쳐,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임명되고, 이인규는 검찰 요직인 중수부장에 임명되어 모두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번 수사에서 임채진 검찰총장은 배제되고 이 부장이 청와대와 직접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기도 했다.

이인규 인맥

이명박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정동기 민정수석, 이상득의원의 전비서실장이자 안국포럼 출신인 장다사로 민정비서관과 함께 경동고등학교 동문으로 교분이 있다.

이인규 부장의 노무현 대통령 수사

검찰 특수부의 7개 보직 중 하나도 거치지 못했지만, 2009년 1월 대검 중수부장에 중용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수사를 지휘했다. 하지만 상관인 임채진 검찰총장의 지휘를 무시하고 보고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뜻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한편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당했다. 이인규 중수부장 밑에서 수사를 맡은 홍만표 기획관은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고가 회갑시계 선물이 조선일보등에 보도된 직후 '검찰 내 빨대(내부 취재원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를 색출해 처벌하겠다'고 격앙되게 반응하였지만 흐지부지 끝냈는데 검찰 내에서는 당시 그가 말한 '더러운 빨대'가 자기 윗선이어서였다고 한다.

2009년 6월 12일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5분만의 발표로 종결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혐의는 '뇌물수수'로 밝혔다. 하지만 구체적 증거를 내놓지는 않고 '역사적 진실'은 수사기록에 남겨 보존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수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문재인 변호사는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변호인단은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과 함께 이번 수사결과 발표는 책임 회피와 자기 변명으로 일관됐다고 비판했다

이 수사의 발단은 2008년 7월 국세청 한상률 전 청장이 관할이 아닌 조사4국을 시켜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한 후 박연차씨와 노 전 대통령 가족 간의 돈거래 내용을 이상득 의원에게 보고하고, 현 여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등에 의한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은 뺀 채 청와대에 직보해 검찰 수사가 이뤄지도록 했다는 의혹이 있다. 한상률 전 청장은 2009년 초 해외로 도피했으며 검찰은 한씨에게 형식적인 이메일 조사만 했다.

태광실업 특별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박연차는 '의형제'인 천신일 회장에게 구명 로비를 요청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동기인 천신일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당비 30억원도 대신 내준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막후실세로 통하는 천신일 회장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의지 앞에 별 소용이 없었다.

2008년 12월 검찰에 구속될 때 원래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박연차는 지금까지 정관계 인사에게 현금이나 상품권만 주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가 안고 가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검찰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중인 외아들의 병역기록을 검토하고 태광실업 경영을 맡고 있던 장녀를 비롯한 세 딸과 사위를 출국금지하고 소환했으며 상속세를 탈세했는지 검토를 시작하자 결국 박연차 회장은 수사협조를 약속했다. 그러자 딸과 사위에 대한 출국금지가 풀렸으며 외아들의 병역문제도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

참여정부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는 이인규 중수부장이 노무현 대통령 소환조사시 대단히 건방졌으며,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이글은 위키백과의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





문재인
(文在寅,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 출생)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참여정부시절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과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역임하였다.

 

문재인 이력

인권운동가 문재인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운동권으로서 1975년 시위와 관련해 구속되기도 했다.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 노무현이 정치인으로 변신해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협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묵묵히 인권변호사로 일해왔으며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동의대 방화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문재인과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어려워 부산으로 내려가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하면서 노무현 전대통령과 연을 맺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 실장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문재인은 검찰의 박연차 수사에서도 노 전 대통령 변호인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참여정부시절 문재인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내다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네팔 산행 도중 노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변호인단을 꾸렸으며,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국정 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다. 윤태영 연설기획 비서관 등 핵심 참모진도 문 실장을 친형처럼 잘 따랐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 '왕수석'으로 불렸다. 문재인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전 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 동문은 한명도 없었다. 두 사람은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고교 동기인 고위 공직자가 文수석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 한다.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다.

문재인 관련 일화

문재인은 특전사 수중폭파조 출신으로 스킨스쿠버를 즐겼고 아무런 장비 없이 바닷물에서 해삼과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별봐라 산악회를 조직, 금정산 야간산행을 즐길 정도로 산을 사랑했다. 웬만한 들꽃, 들풀 이름은 식물학자 뺨칠 정도로 잘 안다고 한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부산의 대선본부장 시절 중앙당에 공식 지원금을 요청하는 말을 꺼내는 데 30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문재인 약력

  • 2007. 08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 2007. 03 ~ 2008. 02 대통령 비서실 실장
  • 2005. 01 ~ 2006. 05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2004. 05 ~ 2005. 01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 2003 ~ 2004. 02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부산/경남지역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표
  •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 1988 한겨레신문 창간위원
  • 1984 부산해양대 해사법학과 강사
  • 1983 법무법인부산 대표변호사
  • 1980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 1980 경희대학교 법학 학사
  •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