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재방송 동영상

계백, 계백 시청률 9.3%, 계백 효민, 계백 여주인공, 차인표 무진, 의자왕 조재현, 사택비 오연수, 은고 송지효, 교기 진태현, 계백 이서진

ohmylove 2011. 8. 2. 15:18

계백(階伯, ? ~ 660년)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전사했다. 흥수, 성충과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계백 생애

660년(당나라 고종 현경(顯慶) 5년, 백제 의자왕 2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계백은 장군으로서 5천 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이때 계백은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손으로 식구들을 죽였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 앞에서 월(越)나라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吳)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용기를 다해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삼국사기》열전) 이에 신라군은 장수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내보냈으나 전사하고, 반굴 다음으로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官昌)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감안해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에 고무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을 공격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계백 가족관계

계백 사후의 평가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려있는 데에서 고려 시대에 이미 유교적 대의명분에 입각해 계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이르면 유학자들로부터 이미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조국을 끝까지 지키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진 영웅이자 충신이라는 추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백제 말년의 재상이었던 성충이나 흥수와 함께 계백을 백제 말기의 3충신의 한 명으로 꼽았으며, 백제의 역사를 거론하면서는 백제 멸망의 부분에서 꼭 빠지지 않고 계백의 이름을 언급했다.

신라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유명한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무도했고 도의에 어긋난 지나치고 잔인한 처사였다는 평가[1]가 있는 반면, 자기 자신도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으로 끝났으니 중도에 어긋나기는 했어도 이것만 가지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2]는 계백옹호론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묘안도 없으면서 마음만 앞서서 처자를 죽인 것이 결국 병사들이 겁먹고 사기(士氣)가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고 싸우기도 전에 패하게 된 것이라는 지적[3]에 대해서도, 자신의 집과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잊어버린 뒤에야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들어 계백을 변호한 주장[4]도 존재한다. 한편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부여 지방을 유람한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어김없이 계백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시를 남기고 있다.

근년의 계백 연구

보통 계백을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5]을 들어 계백은 본래 흑치상지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족의 후손이었다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었다. 열전에서 계백의 풀네임인 것처럼 언급한 '계백'은 실은 계백의 조상이 백제 왕실로부터 분봉받은 지역으로서 그곳은 음운상 《삼국사기》잡지에 나오는 개백현(皆伯縣,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ㆍ외동)으로 비정되며, 계백의 조상이 분봉된 지역이자 계백씨(階伯氏)의 유래가 된 곳이라는 주장이다.[6]

계백 사당과 유적, 그리고 묘소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과 더불어 각지에 위인을 모신 사립학교의 형태를 띤 서원이 건립되면서 계백을 제향하는 서원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중심으로 건립되었는데, 대부분 조선 말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일부가 20세기에 들어서 재건되었다. 알려진 것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4호. 선조 8년(1575년)에 당시의 부여현감이었던 홍가신(洪可臣)이 용정리 망월산에 처음 지었으며, 백제의 성충ㆍ흥수ㆍ계백과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를 제사지낸 것을 시초로 한다. 인조 19년(1641년)에 새로 고쳐 지었으며, 선조 때의 선비 정택뢰(鄭澤雷)와 인조 때의 문신 황일호(黃一皓)를 추가로 더 모시고 제사지냈다.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3년(1866년)에 헐렸다가 다시 지었고, 1971년 지금의 자리인 남령공원으로 옮겨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여(李敬輿)를 중심으로 하고 계백은 곁가지로 배향되어 있으며, 송시열도 이곳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원철폐령 때에 철폐되었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소재.
충청남도시도기념물 제12호. 계백과 함께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숙종 6년(1680)에 세운 서원이다. 고종 5년(1868년)에 폐쇄되었고 1933년 복원하였다. 지금은 문신 11명을 추가로 더 배향하고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13 소재.
부소산성 내에 소재한 이곳은 1957년에 처음 지었고 해마다 10월의 백제문화제 때 삼충제를 지낸다. 현재의 모습은 198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안에는 성충ㆍ흥수ㆍ계백 세 사람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계백장군유적전승지 경내 소재. 해마다 양력 4월에 계백장군 제례를 거행한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황산벌 서북쪽에 해당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기슭에는 오래 전부터 계백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고분이 존재했는데, 이 고분이 확실히 계백의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민간의 전승과 고고학적 추론 외에는 아직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은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1989년 12월 29일에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시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으며, 인근에 건립된 백제군사박물관을 중심으로 현재 성역화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계백을 연기한 배우들

계백 드라마

계백 영화

계백 등장 작품

소설




[1.2강] 의자의 선화 콤플렉스 (허시영 박사) 

■  개설

1. 의자왕은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의 원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신라의 공주였다는 사실은 신라를 13번이나 침공할 정도로 험악했던 정세와 귀족들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단히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신하들은 신라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훗날 백제보다 신라에 득이 되는 일을 할까봐 두려워했고, 다른 왕비들도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여러 명의 부인이 낳은 아들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신라출신이라는 것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장애물로 통하였을 것이다.

무왕은 왜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자 했을까? 신라왕실을 자신의 외척으로 삼음으로써 백제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정치적 의도로 무왕은 이일로 인해 정국의 중심에 확고히 설 뿐만 아니라, 신라와 유화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쟁정국에서 벗어나 그 힘을 내치에 쏟아 부어 강력한 지도력으로 백제를 재무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묘지석을 통해서 의자왕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그가 태자로 책봉된 시기가 632년인데, 이 때의 나이가 40세 정도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돌궐에서도 혼인동맹이 존재하였지만, 외국 합한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은 왕위계승권이 없었다. 의자왕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  선화콤플렉스

1. 의롭고 자애롭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의자라는 말에서 보듯 의자왕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왕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성격이 용감하며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다. 침착하고 사려가 깊다” 어릴 때부터 용감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서 해동 증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오랫동안 정적들의 방해속에서도 그가 태자로 책봉되고,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강성한 귀족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동증자라는 평에 걸맞게 의자왕은 유교정치사상을 강조하여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2.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는 곧바로 신라의 침공으로 표출되었다. 의자왕은 내부의 안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대적인 공격을 해 신라의 40여개 성을 일거에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전쟁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왕권이 강화되게 마련이다. 특히 그는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642년, 장군 윤충을 보내어 경남 합천에 위치한 옛 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통치이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경상남도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은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가는 가장 빠른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을 점령할 경우 경주까지 곧바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야성의 성주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고타소랑은 항복하였다. 이들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다. 윤충은 이들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 사비도성으로 보내는 한편 남여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의 서쪽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김춘추에게는 딸과 사위의 목만이 전해졌다. 의자왕은 그의 이종사촌형이었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충격을 받은 김춘추는 복수의 칼을 갈게 되고, 백제와 신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대야성 전투는 삼국통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의자왕은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석을 내어주었다. 이렇듯 그는 선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정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역량과 정치적 입장을 검증받을 기회로 삼았다.

4. 의자왕은 재위 3년에 신라의 대중국 교섭지역인 당항성, 지금의 경기도 남양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간의 연변통로를 차단시키려고 하였으나,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나라가 개입할 것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의자왕은 안으로는 인덕정치로서, 밖으로는 전승을 통하여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외교에도 심혈을 기울여 재위 12년까지 당나라와 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당 태종은 사부낭 중 정문표를 보내어 의자왕을 '주국대방군공 백제왕'에 책봉했다.


5. 왕권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킨 의자왕은 무왕 대와는 다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643년부터 백제는 당과의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신라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무왕대 일정하게 거리를 두어왔던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어 대당교통로의 차단을 시도했다. 재위 15년에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은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서 30여 개 성을 점령하였다. 2년에 한번 꼴로 자신들을 공격해 오는 강성한 백제군의 위력 앞에 신라의 지배층은 큰 위기의식을 갖고 이를 헤쳐 나갈 방법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수세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을 분주히 모색하고 있었다.

■  친위쿠데타, 독주, 그리고 멸망

1. 왕권을 공고하게 다진 의자왕은 내부로 눈을 돌려 무왕의 왕비이자 실권자였던 계모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정변을 단행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대좌평 지적이 죽었고, 이듬해 정월에 의자왕의 어머니가 죽었으며, 또 무왕의 아들이요 의자왕의 동생인 교기왕자와 그 어머니, 여동생 등 여자 넷, 그리고 고위관료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초기에는 고구려, 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지배질서를 확립하는데 주력하였다. 친위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들을 대거 제거함으로써 어느 정도 왕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2. 권력의 독주는 향락과 권력부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의자왕의 사치와 타락은 백제멸망의 중요한 요인이 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일본서기 제명 6년 7월 조에는 “혹은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군대부인 요녀가 무도하여 국병을 제 마음대로 빼앗아 현량을 주살한 까닭에 이 화를 불렀다.” 은고는 노쇠한 의자왕이 사치와 향략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은 틈을 타고 전횡을 일삼았다.

해동증자로 존경을 받았던 의자왕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측근 세력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사치생활을 하여 재정을 낭비했고,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망해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날마다 연회를 열어 간신배와 궁녀들과 함께 즐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변방의 일은 윤충 장군이, 조정은 상좌평인 성충이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라는 의자왕의 말에서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충성 어린 마음으로 나라를 어질게 돌볼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충고하지만 의자왕은 귀 기울이지 않았고, 성충은 옥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위기에 처한 백제를 근심하며 의자왕에게 상소를 올려서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에 대해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방도를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이것은 결국 백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시영박사올림

원본글 : http://www.imbc.com/broad/tv/drama/gyebaek/history/?list_id=1730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