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세상읽기] 아시아를 떠도는 천안함 / 정문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6. 9. 07:54


            
            

  





[세상읽기] 아시아를 떠도는 천안함 / 정문태


  

“저렇게 결론(북한 어뢰 공격) 내려도 되는 건가?”
“저런 증거로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가 천안함 침몰 조사 결과를 발표했던 지난 5월20일, 마침 광주 아시아자유언론포럼에 참석했던 내로라하는 아시아 10여개국 언론사 편집장들과 언론학자들은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한마디로 발표 내용을 곧이들을 수 없다는 물음들이었다. 그이들이 나름대로 아시아의 여론을 주무르는 이들이고 보면, 이명박 정부는 아시아 시민사회 설득에 실패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피디에프 파일 5쪽짜리로 입수한 영문판 조사보고서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첫 장 왼쪽 머리에 영어로 보도통제용 ‘Embago’(어디서 보긴 한 모양인데 얼마나 급했으면 Embargo란 철자마저 엉터리로 쓴)를 걸고, 오른쪽 머리에 한글로 ‘정예화된 선진강군’ 로고를 붙인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천안함 침몰 조사결과>란 제목을 달고 있다. 근데 이 보고서는 민군합동조사단이란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정작 어디에도 조사자나 발표자 사인이 없다. 게다가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전문가들이 조사단에 참여했다지만 그이들이 누군지도 알 수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의문을 단 내용은 제쳐놓고라도 문서 형식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런 조사보고서로 국제사회를 설득하겠다는 의지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조사보고서는 전쟁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무서운 문서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부실한 문서를 국제사회에 겁없이 날렸다. 달리 말하면, 한국 시민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우 용감한 정부를 지녔다는 뜻이다.

아무튼 이 조사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 증거들을 통해 북조선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란 명백한 결론(clear conclusion)’을 내리면서 ‘그 말고는 달리 마땅히 설명할 수 없다’(There is no other plausible explanation)로 마친다.

이건 보고서라기보다 아예 호소문이다. 온갖 전문가들로 짠 조사단이란 자들이 결과를 놓고 설명할 길이 없어 끼워 맞췄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명백한 결론’을 내린 자들이 왜 꼬리를 빼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그 말고는 달리’란 말을 덧붙였을까? 어떤 조사보고서에서도 이런 상극인 두 문장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 결론에 자신이 없거나, 속이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하기야 한글로 만든 조사보고서를 놓고도 많은 한국 시민들이 의심하는 마당에 남의 글로 쓴 문서야 오죽하겠냐마는. 해서, 조사단 가운데 아무도 이 보고서에 서명할 마음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보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시아 시민사회는 천안함 조사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 내에서도 그렇듯이, 아시아 곳곳에서도 천안함을 놓고 ‘미국의 대북 공격 전초전’이니 ‘미군의 특수 폭탄 실험’이니 별별 음모론이 다 나돌고 있다. 이런 마당에 미국과 나토를 비롯한 20여개 정부와 국제기구들이 북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고 다 된 게 아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천안함을 끌고 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북한은 포괄적 유엔 제재(1874호)를 받고 있는 상태다. 더구나 충분치 않은 증거 탓에 중국과 러시아가 마다해 안보리 결의안보다 낮은 수준인 의장성명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게 되든 실질적인 대북 제재 방안도 없긴 마찬가지지만.

이명박 정부가 즐기는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별로 이문 없는 장사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그 시간과 비용으로 아시아 시민사회를 파고들고 설득하는 편이 훨씬 남는 장사다. 어려울 것도 없다. 시민사회를 사로잡지 않고는 길고 깊은 국제관계도 없다는 상식을 깨닫고, 어설피 급조한 천안함 조사보고서 같은 것들이 국제사회에 돌아다니지 않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아시아네트워크 편집장


          문화복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