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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 타계 : 엘리자베스 태일러 주요 작품 및 생애

ohmylove 2011. 3. 24. 10:58


안녕하세요. 영국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가 사망 했다는 소식입니다. 

세계 10대 미녀 중의 한명이라고 불리울만큼, 세기의 미녀입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에 출연했던 모습을 보시죠. 



 


                                                                《제인에어》첫 판의 타이틀 페이지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Dame Elizabeth Taylor, DBE, 1932년 2월 27일~ 2011년 3월 23일)는 영국의 배우이다. 리즈 테일러(Liz Taylor)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999년 DBE 작위를 받았다.


생애

런던의 햄스테드 지역에서 영국에 거주했던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눈의 홍채 색깔이 아주 드문 제비꽃 색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원래 연극 배우였다.(결혼하면서 은퇴) 7 세때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족으로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칼럼니스트 헤더 호퍼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12세의 나이로 영화에 데뷔한다.



경력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다. 유니버셜 영화사와 계약이 작품 뿐이었던 《명견 랫시의 귀로》(Lassie Come Home)에서 대역을 찾던 MGM과 7년 계약을 맺는다. MGM과 계약 후 첫 작품은 헬렌 번즈의 역할로 샬럿 브론테의 소설을 영화화한 20세기 폭스의 1944년작 《제인 에어》였다. 이 시기에 다시 MGM 영화를 찍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 같은 해 1944년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을 찍었다. 하지만 그녀를 스타돔에 올려준 것은 MGM의 영화 《내셔널 벨벳》(National Velvet)에서 벨벳 브라운의 역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벨벳 브라운은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하기 위해 애매를 길들이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또한 믹키 루니와 영국의 신인 안젤라 란스베리를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며, 1944년 12월 개봉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테일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후의 많은 문제들이 이때 《내셔널 벨벳》를 찍다가 다친 척추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이었다.

내셔널 벨벳은 박스오피스에서 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그녀는 3만 달러로 인상된 연봉으로 장기계약에 서명했다. 이 영화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테일러는 또 다른 동물 영화 《용감한 래시》(Courage of Lassie)에 투입되었다. 1946년 이 영화의 성공으로 더 인상된 $1,500의 보너스와 주급 $750에 계약을 했다. 1947년 워너브라더스의 작품인 《아버지와 인생》(Life With Father)을 에서는 매리 스키너의 역을 맡았으며, 같은 해 《신시아》(Cynthia)에서는 신시아 비숍 역을 맡았고, 이듬 해 1948년에는 《쥬디와의 데이트》(A Date with Judy)에서는 캐롤 프링글 역을 맡았다.

이후 《녹원의 천사》, 《밝은 이야기》 등으로 셜리 템플의 차세대 소녀 스타로 활약했다.


<자이언트>(Giant)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제임스 딘의 유작으로 지금은 더 널리 알려진 영화. 하지만 제임스 딘이 불우의 사고를 입기 전까지 이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몫이었다. 테일러는 1956년 당시, 20대 초반으로 육감적인 몸매와 눈부신 외모를 뽐냈다. 영화에서 테일러는 딘과 록 허드슨을 애태우게 만드는 삼각관계의 주인공 ‘레슬리’를 연기했고, 두 배우 사이에서 팽팽한 연기대결을 선보여 호평을 얻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배우, 제작자 등과 수 차례 스캔들에 올랐고 실제로 8번이나 결혼을 경험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는 영화에서 불완전한 사랑과 유독 인연이 많았는데 1958년작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도 그 중 하나다. 영화에서 테일러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브릭’(폴 뉴먼 분)과 결혼하지만 그가 한쪽 다리를 잃자 감정의 혼란을 겪는 ‘메기’로 분했다. 테일러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메기의 캐릭터를 빌려 뛰어난 감정 연기를 선보였다. 테일러는 실제로 1958년에 남편이었던 제작자 마이클 토드를 사고로 잃고 그의 친구였던 가수 에디 피셔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버터필드 8>(BUtterfield 8)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0년작 <버터필드 8>에 이르러서 미모와 연기력 모두에서 절정에 올랐다. 테일러는 이 영화에서 고급 매춘부 ‘글로리아’를 연기했고 진정한 사랑을 찾지만 과거를 씻어내지 못하는 비운의 여성을 빼어나게 묘사했다. 결국 그는 이 영화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테일러가 보여준 한 여성의 굴곡진 개인사는 처절한 반면 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란제리 차림의 테일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선 모습의 영화 포스터는 당시,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테일러는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와 함께 출연했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여배우보다 남자배우에게 출연료가 후한 것은 지금이나 그 때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테일러는 1963년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고, 명실공히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았다.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출연하며 받은 액수는 100만 달러. 그는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100만 달러 계약서에 사인한 스타였다. 장장 240여 분에 달하는 영화에서 테일러는 시저 왕과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겪는 클레오파트라로 분했다. 당시 기혼자였던 테일러는 안토니우스를 연기한 리처드 버튼과 실제로 사랑에 빠져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한 여배우는 많았지만 그녀의 삶을 가장 잘 소화한 것은 지금까지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평가 받는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졸업> <클로저> 등을 연출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데뷔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년작)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도 남다른 의미로 남겨진 작품이다. 눈부신 미모가 먼저 보였던 전작들과 다르게 이 영화에서 테일러는 자신의 연기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영화에서 그는 대학교수의 아내 ‘미사’로 분해 남편을 매몰차게 몰아 부치는 표독스런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서른 중반에 접어들었던 테일러는 이미지 변신을 위해 수위를 넘어서는 거침없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메이저 영화사상 처음으로 욕을 사용한 여배우로 기록했다. 테일러가 당시 영화에서 내뱉은 욕은 지금은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S**t’이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




결혼

테일러는 8차례 7명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테일러는 토드와 피셔와 결혼을 한 동안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유대교로 종교를 바꾸었다.





자손
 
  • 와일딩 (두 아들)
    •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1953년 1월 6일)
    •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 (1955년 2월 27일)
  • 토드 (딸 하나)
    •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 (1957년 8월 6일)
  • 버튼 (딸 하나)
    • 마리아 버튼 (1961년 8월 1일)

1971년 테일러는 39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임종 시 4자녀들과 10명의 손자 그리고 4명의 증손자가 곁을 지켰다




사망

테일러는 말년에 여러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2004년에는 심부전증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2009년에는 누수관을 교체하는 심장수술을 했다. 2011년 2월에는 심부전에 대한 새로운 증상으로 치료를 위해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했다.

2011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4명의 자녀들 사이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