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흙먼지 마시며 돌깨던 신작로 자갈부역“ <옛시골 추억1>
부역이 의무였던 지난세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만큼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경제발전으로 국가가 부강해 지면서 국민이 짊어져야 했던 부역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역(負役)은 국가나 공공기관이 국민에게 지우는 의무적인 노역,즉 노동으로 임금이나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며 병역의 의무와 함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역(公役)의 하나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방어용 성을 쌓거나 새로이 길을 낼때 또는 궁궐이나 관청을 짓고 임금행차 길을 닦을 경우는 물론이고 전쟁이 났을때 군량조달,무기제작,군수물자 운반등 대부분이 백성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역은 재정이 열악하고 경제적 낙후로 사회간접 자본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6.25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국가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재건합시다'라는 구호아래 부역에 동원되어 땀을 쏟았고 홍수,가뭄,산불 발생시 피해현장에 동원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때는 마을회관을 짓거나 골목정비,마을내 도랑,개울등 하천정비 모두가 부역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모래를 깔거나 도로변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거나 도로변 코스모스를 심는것도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부역은 대개 집집마다 한명씩 참가하는데 남자들은 지게에 삽,괭이,곡괭이등 연장을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몸뻬차림에 호미,빗자루,삼태기등을 들고 나오는게 기본 복장이었다.
1960~70년대 비포장 신작로와 자갈부역
부역은 대개 국가나 관청이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수시 부과하는게 기본이었지만 연례행사화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부역이 있었다. 대표적인게 도로관리를 위한 자갈부역이다. 요즈음은 국도(國道)는 물론이고 시골 지방도로까지 거의 100%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포장된데다 도로주변 잡초제거까지 임금이 지급되는 공공근로가 담당하기 때문에 도로와 관련된 부역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도로가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렸던 비포장 땅길이었던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도로를 관리,유지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도로면에 자갈을 깔지 않으면 안되었다. 큰비가 내려 도로가 파여 나가거나 지반이 약한곳은 노면이 꺼져 차량이 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자갈을 깔아 메우고 다져 노면을 튼튼히 하는것은 도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필수조건이었다.
도로는 인적,물적 교류와 이동,소통의 수단으로 국가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정보통신 수단의 발달로 사람이 이동하지 않고도 의사교환등 정신적 소통에는 불편함이 없는 오늘날에도 도로가 마비되면 물질적 소통에 장애가 생겨 국가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 식량은 어느정도 주변에서 자체 조달할수 있어 당장 생물학적 생존자체가 어렵다고는 볼수 없지만 장기화할 경우 국가경제 파탄에 이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악영향을 미칠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도로 유지관리는 국가와 행정기관의 주요업무다. 요즈음에는 도로공사나 국토해양부 산하 국토 유지 관리 사무소등 전담기관이 예산과 장비를 사용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비포장 도로가 대부분이었던 80년대 이전에는 지방 행정기관이 가가호호마다 자갈부역을 부과하여 도로를 관리하였다. 따라서 마을과 각가정은 자갈부역이 적지않은 부담이 되었다.
병든 신작로 살려냈던 자갈부역,사라진 옛추억으로 잠들다.
자갈부역은 대개 농사일이 시작되기전인 봄에 하게 되는데 마을마다 담당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가구수에 따라 마을 담당구역이 길거나 짧았다. 마을담당 구역은 다시 각 가정마다 책임구역을 나누는데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도랑이나 개천이 가까운지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느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불만을 없애기 위해 해마다 심지를 뽑거나 추첨을 하여 자갈간(가구당 책임구역)을 정하였다.
이때 배정된 자갈간은 5~10m 내외였다. 자갈간 배정이 끝나면 정해진 기간내에 50센티 이상 높이의 삼각형 형태로 자갈을 쌓아야 한다. 자갈부역이 시작되면 리어카등 손수레,지게,함지박,삼태기등 돌을 나를 수 있는 도구와 돌을 잘게 부술수 있는 해머,쇠망치를 휴대하고 식구들 대부분이 자갈부역에 나선다. 마을이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은 점심을 준비하여 꼭두새벽에 집을 나와야 했다.
자갈간 부근 산에 돌이 많거나 도랑이 가까이 있으면 자갈부역을 마치기가 쉬웠지만 주변에 돌이 없는 경우 멀리까지 돌아 다니며 돌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여간 힘드는게 아니었다. 또 잔자갈이 많지 않아 큰돌을 가져다 감자크기로 잘게 부수어 쌓아야 하기 때문에 돌깨는것 또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당히 할수도 없었다. 부역이 끝나면 면서기가 나와 점검을 하여 퇴짜를 맞으면 다시 해야하고 불합격이 많을수록 마을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보니 부역기간중 마을이장의 닥달도 매우 성가실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면서기의 위세가 보통이 넘었던 때라 잘못보여 좋을게 없었다. 그러나 돈이 없고 일할사람이 적은집은 속을 흙으로 채우고 자갈을 덮어 요령껏 모양을 내는것으로 슬쩍 때우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점검할때 자세히 눈여겨 보거나 발로 한번 밟아보면 금방 들통나게 마련이지만 자갈부역의 고충을 알기에 대부분 눈감아 주었다.
이처럼 오고가는 차량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마셔가며 자갈부역이 끝나면 봄비가 내릴 무렵 군청 건설과가 보유하고 있는 구레이다가 자갈을 깔아 도로면을 고른다. 땅크라고 부르기도 했던 구레이다는 대형바퀴가 앞뒤로 달려있고 중간 하단에 삽날이 비스듬히 달려있는 건설장비로 주로 도로면 고르는데 사용되었다. 비포장 신작로가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뀌면서 구레이다도 대부분 퇴출되어 요즈음에는 구경하기 힘들다.
구레이다가 자갈을 깔고 울퉁불퉁하던 노면을 고르고 지나가면 말끔한 신작로로 다시 태어난다. 이처럼 병든 신작로를 살려내기 위해 돌을 지고 나르느라 허리가 휘어지고 어깨가 빠지도록 쇠망치질을 해야했던 1960~70년대 자갈부역,포플러 나무 큰가지를 잘라 가로수를 심던 그시절,이제는 사라진 한조각 옛추억이 되어버렸다.
-문화복지신문 김환태 논설위원-
기사 출처 : [제클뉴스]
http://news.zecl.com/news_view.php?bo_table=m3&wr_id=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