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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구 의 봄은 오는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4. 1. 12:11


만물이 약동하는 춘3월의 계절이다. 새봄 을 알려오는
객들은 이젠 여인네 들 옷자락 에서 뿐만이 아니다.
다양하게 각기 분야에서도 봄내음이 물씬풍긴다.
봄소식을 전달해준 우리식탁 음식 맛.
손맛 자랑 에서부터 괭가리 소리와 장구.
소북 음률에서 묻어나온 소리역시 변함없는 춘“봄” 속에 새봄이 찾아온다.
봄이오는 소리로 의미있는 사람은 더더욱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자연의 소리는 그만큼 우리를 정답게 맞이하며 의인같은 친구이지만
순리에 어긋나면 소리없이 우리의 곁을 떠나버리는 야속한 친구이기도 하다.
겨울 내내 추위에 움추렸던 가지나무들도 기지개를 펴고
눈 달린 망울을 영글어 놓으며  파란 새삭 들은 속삭이듯
바람에 못 이겨 흔들거리고 있다.
가파른 언덕위에 개나리 가지나무 군락도  겨울을 이겨낸  
희열감에 환희에 찬  미소를 띄우며
노란 꽃으로 단장을 하며 손님 맞이에 나보다 더 극성이다.

우면산 의 장고소리는 관악산 과 청계산을 넘나들며 메아리로 둔갑한다.  
덩덕쿵 !덩덕쿵  ! 설장고소리“ 가락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힘이 실려있다.
우리의 혼“이 묻어 전설에 내려오기까지 일조한 김병섭선생 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악의전당 국립국악원에서 3월31일 오후 6시를 기해
국악부문의 김병섭선생 설장구 문화향연및 추모공연시간이 임박하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있는모습으로 공연장 관람객석을 모두 메우고 있었다.
오후7시30분 선생의 22년추모공연을 맞이한다.

농악을 비롯한 설장구 와 함께 김병섭선생의  생전의 활동과 전설적인
신화 이야기를 정읍국악사 황미연씨를 통해 들어보자.

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 농악판 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1921년 정읍시 북면에서 태어나 김학순에게 설“장고를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설”장고
명인으로 올라섰던 김병섭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운명적으로 농악과 만나게 됐다.
김병섭은 자신의 나이 열한 살 때 자신의 형이 수리조합에서 돈을 빌어서
농‘악기를 장만하면서 농악을 접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김학순을 스승으로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배울 만큼
김병섭은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김병섭은  기본가락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김학순 씨도 김병섭의 타고난 재주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나흘 만에 작파(作破)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장고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김병섭은 몰래 숨어서 사흘 동안 배운 가락을 혼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대동아 전쟁 때 일본인에 의해 싱가포르 함락 기념축제에서
장고‘잽이로 나서기도 했던 김병섭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징용에 끌려 나가 아오지 탄광에서
스물다섯 살 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마을마다 농약을 다시 쳤고 서울에서는 농악경연대회도 열렸다.
특히 일본군은 당시 정읍농악단의 명성을 알고 기념축제를 하라고
악기를 내주기까지 했으며 정읍마을 농악대회를 불러 모아 굿을 하라고 해서
장고를 신나게 쳤다는 기록도 보여 당시 정읍농악의
인기가 우수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시절 그는 새로운 삶을 맞는다.
이승만 정권은 농악을 장려, 해마다 농악경연대회를 열었고
재주 있는 잽이 들은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면서 솜씨를 뽐냈다고 한다.
당굿이며, 풍장이며, 걸궁이 쉼 없이 이어졌고 잽이 대접도 푸짐해졌는데
이때 그의 솜씨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에 정읍을 중심으로 전북일원에서 그의 가락은
가장 높은 경지의 수준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한창 장고 잽이 로서 유명해졌을 때,
남원국악원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로만 구성된 여성 농악대를 만들었다.
이 여성농악대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성공을 거두자,
흥행만을 목적으로 한 여성농악대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남자들은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들은 농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김병섭은
그러한 여성농악대만을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농악대는 처음부터 농악의 원형과는 관계없이
흥행만을 노렸기 때문에 변질된 농악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여성농악대가 자취를 감추자 전통음악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생겨나서 자유당 때 하던 농악경연대회를
그곳에 합류시켰다고 한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에서 정읍농악으로 개인상을 수상하며
중앙무대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김병섭은
1963년과 1964년에 개최된 제4회와 제5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정읍우도농악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며,
1956년에 이어 1964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설‘장고로 개인상을 수상해 명인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전국민속경연대회는 원형보존보다는
우선 눈에 잘 띄게 하는 것이 관심을 더 쏟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나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여러 지방의 특색적인
농악의 원형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생전에 몹시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병섭은 정읍을 벗어나서 1968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병섭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 아닌 편화봉사단원으로 활약했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미국인은 김병섭의 장고솜씨를 보고 그에게 매달려 서울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때 김병섭은 식구들을 고향에 둔 채로 올라와
서울 안국동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미국인과 동료들에게 장고를 가르쳤다.
서울로 올라온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김병섭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한양대와 서울예고,
선호예고 등에 나가 후학들을 지도하며 돈암동에 있던
김병섭 농악 연습소 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락은 전라우도 농악 즉 정읍농악의 진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명인으로 추앙 받을 만큼 튼튼했다.
혼자서 할 때는 설‘장고와 둘이 할 때는 쌍 장고라 하는데,
그의 장고 잽이 놀이는 느린 굿거리, 활발한 동살풀이, 구성진 구정놀이,
흥겨운 덩덕궁이, 격력한 다르래기로 가락을 달고 맺고 풀면서 몰아간다.
김병섭은 한국 농악사 에서 장고 잽이 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전통문화유산에 밑거름이 된다.
특히 그의 장기였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히는
김도삼의 제자 김학순, 백남길 에게서 배운 정확한 계보를 갖고 있어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명인 김병섭,
당시 젊은 세 사람 이정범, 전사섭,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향토적인 가락을 발전 시켰으나 그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김병섭은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을 근저로 정읍농악우도농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산파(産婆)역할을 했다.
김학순으로 이어졌던 설장고를 이정범이 이어받았고,
또다시 김병섭이 이정범의 전통을 이어냄으로써 정읍우도농악
설장고의 전승구조를 이어내는 가교 역할을 하게
한 인물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특히 김병섭은 설장고를 체계화하는데
큰 힘을 경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병섭의 장고가락을 악보로 만들기 위해 음악을
전공한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세계가 이해가 된다.
그것을 계기로 김병섭은 점차 학구적인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농악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등 여러 곳으로
농악연구소를 이전하면서 장고교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병섭은 슬하에 3남2녀의 자녀를 남겨두고,
1987년9월11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암이라는 병으로 사망했다.
이제 김병섭은 떠났지만, 김병섭의 고깔 설장고는
우도 농악의 최고로 꼽는 김도삼 제자 김학순, 백남길 에게서
배운 뚜렷한 계보를 갖고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온
명인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
정읍에서 배운 정읍우도 설‘장고를 중앙무대에 수놓고
세계적 인물들에게 가르쳤던 선구자적 예술인생은 이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간 후학들로 꽃을 피우고 있어
김병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농악사 속에서 예혼(藝魂)을 불태우고 있다.
김병섭은 자신의 설장고가 앞장서기만 하면 대낮의 장도 파해버릴 정도로
기량면에서 최고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천하의 김병섭”만이 쳐낼 수 있는 가락과 사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전에 이순을 넘겨서도 일단 설장고만 잡으면
신명을 몰아오고 놀음판은 그의 독무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판굿놀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흥겨워 그 누구도 흉내 낼수
없었던 전설적인 김병섭의 설장고가 그립다.

문화복지신문 장종열기자